인간만이 지구의 유일한 존재라 믿으며 자연의 수많은 비인간적 존재를 망각한 인류는 오늘날 기후 재앙과 끝날 줄 모르는 전쟁을 마주하고 있다. 또한 인종, 계급, 민족, 성에 대한 각종 혐오와 차별은 인간 자신의 존엄성까지 훼손하고 있다. ‘내일’을 향한 발걸음의 출발은 ‘오늘 하루’에 대한 성찰이며 인류는 인간 대 인간, 인간과 자연의 ‘연대’를 통해서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의 지구엔 기후 위기와 전쟁, 혐오와 차별이 난무합니다. 그래도 꿈꿔야 하고, 만나야 할 세계가 있습니다. 세상을 읽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역할이 아닐까요. 전 세계의 다큐멘터리를 만나며 ‘우리가 살고 싶은 하루’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뜻깊은 영화제가 될 것이라 자부합니다.”
다음 달 11일 임진각 평화누리 대공연장에서 개막을 앞둔 제17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이하 ‘DMZ Docs’)의 공식 기자회견에서 장해랑 집행위원장은 “우리가 살고 싶은 하루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 당장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순 없어도 현재를 되돌아보며 살아가고 싶은 하루,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은 미래의 희망을 만드는 시작”이라고 말했다.
지난 19일 서울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는 장 위원장, 장병원 수석 프로그래머, 강진석 프로그래머가 참석해 개막작 및 올해 영화제 특징 및 방향, 전체 프로그램에 대해 발표했다. 올해로 17회를 맞이한 DMZ Docs는 ‘우리가 살고 싶은 하루’라는 주제 아래 총 50개국 143편(장편 88편, 단편 55편)의 국내외 최신 다큐멘터리를 파주, 김포 등에서 상영할 예정이다. 국제경쟁, 프런티어, 한국경쟁 등 경쟁 부문, 베리테, 다큐픽션, 에세이, 익스팬디드의 비경쟁 부문과 그 외 기획전과 온라인에서 상영하며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시대를 관통하며 인류가 공통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그렸다.
개막작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한가운데, 러시아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프로파간다의 현실을 폭로하는 작품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다. 러시아의 교사 파벨 탈란킨(공동 감독)은 정부의 선동과 선전에 분노해 몰래 영상을 기록, 탈출을 준비한다. 조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고뇌에 빠진 그는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가 신병 모집 장소로 이용되는 현실에 분노한다. 해맑은 표정의 아이들이 오와 열을 맞춰 총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은 충격적이다. 장병원 프로그래머는 “탈란킨 감독은 이후 망명자의 신분이 돼 한 번도 해외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는데, 이번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해외(한국)로 나오는 것”이라며 “전쟁 상황, 인권, 폭력에 맞서 양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폐막작 ‘오웰: 2+2=5’(감독 라울 펙)는 조지 오웰의 소설 속 전체주의의 상징적 표현인 ‘2+2=5’를 바탕으로, 전 세계로 확산하는 파시즘과 진실 왜곡을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다. 고전 ‘동물농장’ 속 오웰의 사유를 통해 21세기 오늘날 푸틴과 트럼프 등 권위주의 지도자들이 자유주의를 어떻게 악용하는지, 대중이 어떻게 동조하는지를 날카롭게 담았다.
올해 영화제에는 ‘크리틱스 초이스’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구성돼 첫 번째 수상작에 이목이 쏠린다. 다수의 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제도를 통해 첫선을 보이는 작품을 다루는 것과 달리 제17회 DMZ Docs에선 지난 1년간 극장, OTT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영된 것 중 의미 있는 작품에도 집중한다. 이를 통해 영화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한국 다큐멘터리 비평과 담론의 활성화를 통해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다는 취지다. 현장 비평가들과 DMZ Docs 프로그래머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선정한 11편을 대상으로 심사를 거쳐 1편에 ‘비평가의 시선상(한맥상)’을 수여한다.
다큐멘터리 거장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45편 전작을 순회 상영하는 국내 최대 규모 회고전 ‘프레더릭 와이즈먼 전작 순회 회고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전국 주요 시네마테크 및 예술영화관과 협업해 내년 7월까지 순회 상영할 예정으로, DMZ Docs가 그 시작을 맡았다. 또 다른 기획전은 AI와 다큐멘터리의 관계를 조망하는 ‘인간, AI, 그들의 영화 그리고 그들의 미래’로 다양한 연출자들이 AI를 활용하거나 동반하여 만든 작품을 상영한다.
관객의 문화 향유권을 넓히기 위한 시도도 돋보인다. DMZ 접경 지역 투어를 통해 DMZ의 가치와 평화·통일·생태와 자연의 의미를 새롭게 읽어볼 수 있는 체험 행사 ‘DMZ 다큐 로드’와 경기도민을 위한 무료 공연과 토크, 다큐멘터리 야외 상영 부대행사를 진행하는 ‘다큐 콘서트’ 등 다양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도 진행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올해 3회째인 비(非)극장 상영 프로그램은 ‘자연의 얼굴’을 주제로 고양시 예술창작공간 새들과 김포시 애기봉 평화 생태공원 전시관에서 진행된다. 경기도 전역으로 상영 공간을 확장하는 취지를 담은 ‘DMZ Docs 플러스+’는 경기인디시네마관, 성남미디어센터, 포천 미디어센터, 화성시 작은영화관에서 각각 진행된다. 특히 올해 영화제는 관객의 편의를 위해 운정중앙역(GTX-A)-임진각 평화누리 간 셔틀버스를 운행할 예정이다.
이날 기자회견에선 공식 트레일러를 연출한 박봉남 감독(‘1980 사북’, 제16회 DMZ Docs 한국 경쟁 부문 대상 수상)이 함께 자리했다. 겨울 산에서 눈에 덮인 새싹을 담은 박 감독은 “손을 잡고 연대하지 않는 한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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