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0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석유화학업계 사업재편 자율협약식’에서 “업계는 과잉 설비를 줄이고 고부가가치·친환경 전환을 통해 질적 성장으로 나가는 데 뜻을 모았다”며 “연말까지 사업 재편 계획을 마련해 흔들림 없이 신속히 이행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어 “기업이 책임 있게 사업 재편에 나선다면 정부도 금융·세제·연구개발(R&D) 지원 등 맞춤형 지원을 하겠다”면서도 “무임승차 기업에는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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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기거나 망하거나…에틸렌 감산 ‘딜레마’
업계는 딜레마에 빠졌다. 전체 에틸렌 270만~370만톤(t) 감축이라는 큰 숫자가 제시된 상황에서 먼저 감축에 나서는 기업은 시장점유율 축소와 매출 하락, 이에 따른 고부가 제품 투자 여력 감소를 떠안을 수밖에 없어서다. 반대로 감산을 늦추면 정부가 말하는 ‘무임승차 기업’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그나마 대기업은 자금 여력과 다각화된 사업 구조 덕에 시간을 벌 수 있다. 정부가 구체적 지원책을 내놓을 때까지 버텨보자는 전략적 선택이 가능한 셈이다. 반면 설비 규모가 작고 고정비 부담이 큰 중소형 업체는 버틸 여력이 없다. 가동률이 조금만 떨어져도 곧바로 적자로 전환되는 구조 탓이다.
더욱이 제품 포트폴리오가 다양한 대기업보다 범용 설비 위주거나 소규모 업체부터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이 탓에 업계 일각에서는 에틸렌을 주로 생산하는 업체들 위주로 ‘제2의 여천NCC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업계 안팎에서는 정부 대책을 두고 ‘맹탕 개편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난해 12월 발표한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 발표 내용에서 크게 나아진 점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이 알아서 생산량을 줄이고 정부는 이를 후방 지원하겠다는 조건부 약속만 내놓은 격”이라며 “어려움에 빠진 석유화학 업체와 지역경제의 현실을 제대로 담지 못한 단기 처방에 불과하다”고 했다.
◇공정거래법 ‘족쇄’ 여전…자구책 걸림돌
이번 방안에 업계가 절실하게 요구해 온 전기료 감면, 세제 지원 등 현실적 대책은 쏙 빠졌다. 정부가 대원칙과 감산 수치만 제시하고 기업 자구노력만 강조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업들은 자발적 감산과 이에 따른 인센티브 정책만으로는 근본적인 산업 위기 극복이 어렵다고 지적한다. 지역 경제와 고용, 협력업체 생태계 등 복잡한 구조개편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설비 매각이나 통합 시행 시 발생할 수 있는 고용 불안과 지역경제 타격 등 사회적 파장까지 짊어져야 하기에 당장 연말까지 구조조정 합의에 속도를 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이미 기업들은 감산, 가동 중단, 설비 폐쇄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전남 여수·울산·충남 대산 등 산단별 기업 통폐합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개편안에 업체 간 구조조정 논의에 ‘족쇄’로 작용하고 있는 공정래위원회 기업결합 규제 완화 내용이 빠지면서 감산을 목적으로 한 업체들의 사업재편 논의는 여전히 막혀 있단 지적이 나온다. 공정거래법상 시장점유율 합계가 해당 분야 1위가 되는 등의 경우엔 기업결합이 금지된다.
실제 이날 협약식에서 업체들은 정부의 전반적인 산업 개편 방안에는 동의했으나 구체적 지원이 없었던 점에 대해 추가 건의사항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엄찬왕 화학협회 상근부회장은 협약식 이후 기자들과 만나 “중국발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관세 장벽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고 공정거래법 규제 완화 요구도 나왔다”며 “피드스톡(원료) 경쟁력 확보 지원과 전기료 부담 완화 등 업계가 그동안 꾸준히 제기해 온 현안이 다시 언급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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