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한국전력이 올해 초 체코 신규 원전 수주 과정에서 미국 웨스팅하우스(WEC)와 체결한 ‘비밀 합의문’의 세부 내용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이 합의에 따라 한국은 향후 50년간 북미·유럽 주요 시장 진출이 사실상 봉쇄되고, 원전 1기당 1조원이 넘는 비용을 웨스팅하우스에 지급해야 하는 구조에 묶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원전업계에 따르면 한수원과 한전은 지난 1월 체코 두코바니 원전 최종 계약 직전 웨스팅하우스와 모든 지식재산권(IP) 분쟁을 종결하는 조건으로 글로벌 합의문에 서명했다. 합의에는 ▲원전 1기당 6억5000만 달러(약 9000억원) 규모의 물품·용역 구매 ▲1억7500만 달러(약 2400억원)의 기술 사용료 지급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독자 수출 시 웨스팅하우스 검증 통과 의무 등이 포함됐다.
또한 합의 이행을 보증하기 위해 한수원·한전은 원전 1기당 4억 달러(약 5600억원) 규모의 신용장을 발급하기로 했다. 업계에선 결과적으로 한국이 수출하는 원전마다 1조원이 넘는 ‘통행세’를 웨스팅하우스에 지불하는 셈이라고 보고 있다.
합의문은 진출 가능 국가와 불가능 국가를 구체적으로 나눴다. 한국은 필리핀·베트남, 카자흐스탄, 모로코·이집트, 브라질·아르헨티나, 요르단, 튀르키예, UAE, 사우디아라비아 등 일부 신흥시장만 수주 활동이 가능하다. 반면 북미 3국과 체코를 제외한 EU 회원국, 영국, 일본, 우크라이나 등은 웨스팅하우스만 수주에 나설 수 있도록 제한됐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가 체코 수주를 ‘유럽 시장 교두보’로 홍보에는 열을 올렸지만, 체코를 제외한 유럽에서 추가 수주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라는 비판이 거세다. 실제로 한수원은 올해 들어 스웨덴, 슬로베니아, 네덜란드 등 유럽 원전 사업에서 잇달아 철수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합의가 지나치게 불평등하다고 지적한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장기간 로열티와 기술 검증 조건은 명백히 불리하다”며 “한수원은 선택지가 거의 없었고, 정부가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실이 체코 수주를 성사시키기 위해 한수원에 합의를 압박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민주당 산자위 소속 의원들은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정부가 원자력 기술주권을 내팽개친 매국적 행위”라며 국정조사와 감사원 감사 청구를 예고했다.
반면, 웨스팅하우스가 자체 공급망과 시공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한수원이 체결한 물품·용역 구매 계약이 결국 한국 기업에 발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국회 산자위에서 “웨스팅하우스가 가져간 몫도 결국 공급망을 갖춘 한국 기업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불리한 협상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고 해명했다.
합의 내용이 공개되자 대통령실은 산업통상자원부에 진상 파악을 지시했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공공기관이 체결한 계약이 법과 규정, 절차를 준수했는지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황 사장은 “국민께 기술 자립과 원천 기술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점은 사죄드린다”면서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정당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감내하고도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뉴스로드] 홍성호 기자 newsroad01@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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