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이재명 대통령이 재계 총수들을 용산으로 불러 ‘원팀’을 강조했다. 워싱턴에서는 관세·투자·에너지 구매를 묶은 4500억 달러 패키지의 최종 조율이 진행되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노란봉투법과 중대재해 공표제라는 굵직한 규제가 병행되고 있다. 외부 통상 협상과 내부 규제 과제가 겹치며, 한국 기업들은 지금 ‘삼중(三重) 트랙 협상’의 한가운데 서 있다.
19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25일·현지시간)을 엿새 앞두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구광모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재계 총수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대통령실은 이번 회담의 경제 의제를 두 갈래로 요약했다. 첫째는 상호관세 인하와 대미 투·구매 총 4500억 달러(투자 3500억 달러+에너지 구매 1000억 달러) 실행 로드맵이고, 둘째는 국내에서 병행되는 노동·안전 규제 대응이다.
정부는 지난달 31일 미국과 상호관세율을 25%→15%로 낮추는 큰 틀의 합의를 확인했다. 동시에 △조선협력펀드(약 1500억 달러) △전략산업 대미투자펀드(2000억 달러) 등으로 구성된 3500억 달러 투자 프레임을 마련했다. 미국산 LNG 등 에너지 1000억 달러 구매 약정을 더해 총 4500억 달러 패키지를 완성했다. 문제는 합의 규모 자체가 아니라 집행의 속도와 매칭이다. △업종별 자본적 지출(CAPEX) 집행 일정 △인허가·보조금 매칭 △전력·인력·부품 공급망 병목 제거가 동시에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15% 관세 인하의 효과가 체감된다.
국내 트랙은 오히려 더 까다롭다. 국회는 이번 임시국회에서 노조법 2·3조 개정(노란봉투법) 처리를 예고했고, 재계는 '최소 1년 유예'를 요구하며, 사실상 최후 통첩을 던졌다. 법안이 원안대로 통과될 경우 원청과 협력사가 동시에 교섭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구조가 된다. 외국계 기업 대상 설문에서도 “법안이 시행되면 본사 투자 지연이나 철회 가능성이 있다”는 응답이 나왔다. 대미 투자 집행률이 국내 노사 리스크에 발목 잡히면 15% 관세 인하의 효과도 무력화될 수 있다. 결국 관건은 정치 공방이 아니라, 시행령·고시 단계에서의 예측 가능성 보장이다.
안전 규제도 동시 진행될 예정이다. 정부는 내년부터 중대재해 ‘재해조사 의견서’ 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기업 명칭과 사고 원인 등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사업장 △명칭 △업종 △규모 △사고 원인까지 드러난다. 이는 곧바로 ESG 평가·신용등급·투자자 실사에 반영돼 자본비용(회사채 스프레드)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단순한 재발 방지 대책만으로는 부족하다. 위험작업 허가(PTW) 기록·안전 교육 로그·하청 안전 성과지표(KPI)를 원청이 연동 관리하고, 이를 데이터로 증빙해야만 ‘공개제도 하의 뉴 노멀’에 대응할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연계형 거버넌스(Linked Governance)’다. 첫째, 대미 투자·고용 KPI와 국내 규제(노조법 시행령·재해조사 공개 범위)를 조건부로 연계해야 한다. 일정 이행률을 달성한 기업·업종에 대해 규제 운영에 명확한 ‘세이프티 밴드’를 두는 방식이다. 둘째, 업종별로 민·관 합동 KPI 위원회를 상설화해 투자 집행·노사 리스크·안전 컴플라이언스를 한 번에 관리해야 한다. 셋째, 정보공개에 인센티브를 붙여야 한다. 안전·노사 데이터를 정량 KPI로 선제 공개하는 기업에는 국책금리·세액공제·수출금융을 차등 우대해, ‘공개=불이익’이라는 고정관념을 ‘공개=자본비용 절감’으로 바꿔야 한다.
워싱턴의 15% 관세와 서울의 4500억 달러 투·구매는 이미 틀이 짜였다. 남은 것은 집행지표다. 정부는 협상 성과를 KPI로 증명하고, 기업은 데이터로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수치로 연결되는 거버넌스, 이것이 이번 주 한국 경제가 넘어야 할 진짜 관문이다.
OECD가 발표한 '경제전망 2025년 제1호: 더 탄탄한 성장을 위한 투자 재점화' 보고서에서 마티아스 코만 사무총장은 “정책의 불확실성이 무역과 투자를 위축시키고, 소비자와 기업 신뢰를 떨어뜨리며 성장 전망을 제약한다”며 “정부와 기업은 불확실성을 예측 가능성으로 전환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고 밝혔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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