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ASEAN) 국가 중 가장 큰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인도네시아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한데다 경제 규모 또한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상당히 매력적인 미래 시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덕분에 인도네시아 경제의 주축이자 소비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살림 가문' 또한 조명을 받고 있다. 인도네시아 경제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인도네시아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에 최적의 파트너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특히 최근 3세 승계 작업까지 본격화되고 있어 변화의 시기를 틈타 기회를 잡으려는 글로벌 기업들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정경유착에 울고 웃은 인도네시아 식품재벌…절체절명 위기서 가문 구한 '재벌집 막내아들'
'살림 가문'의 역사는 화교 출신 수다노 살림이 인도네시아에 정착하면서 시작됐다. 1938년 중국에서 인도네시아로 건너온 수다노가 처음 선택한 사업은 땅콩기름 판매였다. 수다노가 한창 사업에 열중하던 시기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이 벌어졌고 그는 독립군 진영에 식료품을 포함한 여러 물자를 지원했다. 그 시기 독립군을 이끌던 수하르토(Soeharto) 인도네시아 2대 대통령과 친분을 쌓게 된다.
이후 독립군 진영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수다노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정향·밀가루 등 인기 품목의 독점 사업권을 따낸다. 정향은 정향나무 꽃봉우리에 나오는 원료를 기반으로 만든 향신료로 인도네시아의 주요 수출 품목 중 하나다. 지난해 기준 글로벌 정향 시장 규모는 42억달러(약 5조8000억원)였으며 글로벌 정향 시장에서 인도네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80%다.
수다노는 밀가루 독점권을 활용해 새로운 사업도 벌였다. 밀가루를 원재료로 한 제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밀가루를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한 제품 역시 독점 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당시 설립한 '인도푸드(Indofood)'는 단숨에 인도네시아 최대 식품기업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스턴트 라면을 생산·판매하는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후 중앙아시아은행(BCA)을 설립하며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정부가 허가한 독점을 바탕으로 성장한 살림 가문의 사업은 1998년 한 차례 위기를 맞게 된다. 살림 가문의 든든한 우군이던 수하르토 정권이 시민들의 독재 저항 운동에 의해 몰락했고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경유착 비리기업'으로 내몰렸다. 당시 살림 가문의 사업체들은 국유화 또는 해체 위기에 처했다. 이 때 그룹을 위기에서 구해낸 인물은 수다노의 막내 아들이자 2대 회장인 안토니 살림이었다. 수다노는 슬하에 아들 3명과 딸 1명을 뒀는데 안토니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서둘러 인도네시아를 떠나는 선택을 했다.
자연스럽게 유일한 상속자가 된 안토니는 직접 정부와 협상에 나서 BCA 지분과 소유권만 넘기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 당시 안토니의 결단은 은행을 주고 정부의 비호를 가져오는 결과로 이어졌고 덕분에 나머지 사업체들은 다시 정상궤도에 오르게 됐다. 사실상 승계에서 가장 동떨어져 있다고 평가받던 막내 아들이 '가문의 영웅'이자 유일한 그룹 후계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후 안토니는 식품 사업 외에도 부동산, 유통, 통신,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며 살림 그룹을 인도네시아 재계 1위 기업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안토니는 슬하에 장남 엑스턴 살림(Axton Salim), 장녀 아스트리드 살림(Astrid Salim), 차남 앨스톤 스테파누스(Alston Stephanus) 등 세 자녀를 두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엑스턴과 아스트리드만이 그룹 핵심 계열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 중 차남인 앨스톤은 트랜스젠더와의 결혼을 계기로 가족과 인연을 끊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후계자로 지목되는 장남 엑스턴은 그룹의 핵심 사업체인 인도푸드 이사회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주로 그룹의 투자 및 신사업 전략을 총괄하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 최대 식품 기업으로서의 지위를 활용해 농업 및 식품 기술(Food-tech) 스타트업 투자를 주도하는 등 미래 먹거리 발굴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엑스턴은 또한 홍콩에 본사를 둔 지주회사 겸 투자전문 기업 퍼스트 퍼시픽(First Pacific) 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장녀 아스트리드는 경영보단 사회공헌 활동과 ESG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모친인 마가레스 살림(Magress Salim)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살림 재단 이사직을 역임 중이다.
전 계열사 과반 이상 지분 보유, 재산 규모 14조…경영승계 발맞춰 미래먹거리 발굴 박차
살림 그룹의 지배구조는 외형적으로는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매우 단순하다. 안토니와 그의 가족들이 홍콩 증시에 상장된 지주회사 퍼스트 퍼시픽(First Pacific)을, 지주회사가 나머지 계열사를 각각 지배하는 구조다. 특히 안토니 한 사람이 소유한 지주회사 지분만 45%에 달하는 등 사실상 살림 가문의 지배력이 절대적인 구조다. 퍼스트 퍼시픽 역시 인도푸드 등 대부분의 자회사 지분을 50% 이상 소유하고 있다. 과거 인도네시아 금융위기와 독재저항운동 시기 기업을 잃을 뻔 한 기억이 지금과 같은 지배구조의 배경이 된 것으로 분석됐다.
사업체 전체에 대한 확고한 지배력과 더불어 가문 재산 규모만 103억달러(약 14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살림 가문은 최근 3세 경영 준비에 한창이다. 후계자들의 경영 참여와 동시에 주력 분야인 식품을 넘어 새로운 분야로 영향력을 넓혀나가고 있다. 현재 살림 가문이 미래 사업으로 선정하고 공을 들이는 분야는 △전자상거래 및 물류 △디지털 헬스케어 △신재생에너지 △엔터테인먼트 및 콘텐츠 등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기업들 간에 접점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살림 가문 사업체들은 해외 기업들을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반대로 해외 기업은 인도네시아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서로 활용하는 식이다. 그 중에는 국내기업도 다수 포함돼 있는데 일례로 롯데그룹은 살림 가문과 손잡고 인도네시아 이커머스 시장에 진출을 모색했으며 KB국민은행은 전략적 협력을 통해 현지 금융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인구 4억명을 보유한 인도네시아는 인도와 함께 최근 가장 주목받은 소비 시장이다"며 "특히 팜유와 향신료 등에 강점을 지닌 현지 기업들이 다수 존재해 글로벌 식품업체들의 관심이 특히 높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도네시아 내에서 살림 가문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보니 그들과 인연을 맺는 것이 사실상 시장 진출의 필수코스로 여겨지고 있다"며 "최근 살림 가문이 3세 경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만큼 이 부분을 활용한다면 그들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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