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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칼럼니스트] 손흥민이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LAFC로 향했다. 토트넘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 173골 클럽 역대 5위, 주장으로서 유로파리그 우승까지 10년간 쌓아온 상징성과 기록, 그리고 글로벌 팬덤을 품은 채 대서양을 건넌 그의 행보는 ‘손흥민’이라는 거대한 힘의 이동으로 평가된다.
이번 이적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대 변화와 함께 손흥민을 둘러싼 서사 자체가 완전히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에서 ‘아시아의 자존심’, ‘겸손한 동양인 선수’라는 서구 미디어의 시선 속에서 ‘이국적 스타’로 소비되던 손흥민이, LA에서는 50만 한인 커뮤니티의 ‘우리 동네 영웅’으로 완전히 다른 서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이는 디아스포라 커뮤니티가 주류 사회 속에서 문화적 주도권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자, 오타니 쇼헤이가 LA 일본인 커뮤니티에 미친 영향과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손흥민의 이적에 따라붙는 여러 수식어 - 33세라는 나이, 유럽 최고 무대를 떠나는 선택, 그리고 상대적으로 낮은 리그 수준에도 불구하고 MLS 역사상 최고 이적료인 2650만 달러 투입 - 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표면적 현상을 넘어 손흥민이라는 힘의 이동이 만들어내는 더 근본적인 동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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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 거리의 거대한 문화경제권, 전략적 투자처
손흥민의 새로운 홈구장인 BMO 스타디움은 코리아타운에서 차로 20분 남짓 떨어져 있다. LAFC가 손흥민 영입에 MLS 역대 최고 이적료를 투자한 배경에는 이 지리적 조건이 핵심 변수로 작용했다는 평이다. 미국 스포츠 산업에서 특정 지역 커뮤니티와의 강한 연결고리는 곧 안정적 수익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리적 근접성은 문화적 친밀감을 만들어내고, 이는 곧 스포츠 비즈니스의 새로운 동력으로 작동한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경기 관람의 심리적 장벽이 낮아진다. 주말 가족 나들이로 경기장을 찾을 수 있고, 경기 후에는 익숙한 코리아타운에서 식사하며 여운을 나눌 수 있다. 단순히 경기를 보는 것을 넘어 하루 종일 이어지는 ‘문화적 경험’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LA 다저스가 오타니 쇼헤이 영입 후 일본 관광객과 일본인 관중이 늘어났다. 다저스타디움에서 일본어 안내방송이 추가되는 등 가시적 변화를 보인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지역 커뮤니티의 강한 결속력은 일회성 관람객을 정기적인 팬으로 전환시키는 핵심 요소가 된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말한 ‘공간의 사회적 생산’ 개념을 적용하면, 코리아타운과 BMO 스타디움 사이의 거리는 단순한 지리적 수치가 아니다. 손흥민이 그 사이를 오가는 순간, 그는 축구선수 이상의 경제적 가치와 문화적 정체성을 동시에 생산하는 주체가 된다.
△문화자본의 경제적 전환, 세대를 잇는 새로운 동력
LA 한인 사회에서 손흥민은 세대를 잇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LA 지역 매체인 ‘LAist’는 지난 7일 “LA지역에 사는 한국계 이민자들에게 손흥민은 축구스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For Korean Americans in LA, Son Heung-min is more than a soccer star)고 전했다.
손흥민은 1세대 이민자들의 향수와 2세대의 정체성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경기 관람은 세대 간 소통의 장이 되는 셈이다.
1세대에게 손흥민은 고국에 대한 자부심을 확인하는 상징이다. 그들이 미국에서 쌓아온 삶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반면 2세대에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문화적 근거가 된다. 주류 사회에서 때로는 감춰야 했던 한국적 뿌리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내세울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세대 간 공감대는 ‘문화자본’이 ‘경제자본’으로 전환되는 동력이 될 것이다. LA 한인 사회가 축적해온 언어, 음식, 공동체 의식과 같은 무형의 자산이 손흥민이라는 인물을 매개로 실제 경제적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LAFC 공식 온라인숍에서는 손흥민 유니폼이 대부분 사이즈 품절 상태가 됐다. LAist는 “오타니가 다저스에 미친 영향처럼 티켓 판매와 가격 상승이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더 주목할 점은 커뮤니티의 역할 변화다. 한인 사회가 더 이상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문화와 경제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내는 생산자가 됐다. 경기장에서 한글로 쓰인 응원 피켓을 들고, 한국어로 응원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이제 자연스러운 풍경이 됐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스포츠 팬덤을 넘어 디아스포라 커뮤니티의 문화적 자신감 회복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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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 애플TV 관심 높아져
손흥민이 LAFC로 이적한 후, 한국 팬들은 그의 경기를 시청하기 위해 애플TV의 ‘MLS Season Pass’라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플랫폼에 주목하고 있다. 애플TV+ 구독자는 월 1만9000원, 비구독자는 월 2만2000원의 MLS 시즌패스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는 기존 케이블 스포츠 채널보다 높은 비용이지만, 손흥민을 보기 위한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내 OTT 시장에서 애플TV+는 넷플릭스 33.9%, 티빙 21.1%, 쿠팡플레이 20.1%, 웨이브 12.4%, 디즈니플러스 8.7%라는 주요 경쟁사들의 점유율과 비교해 미미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손흥민 효과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는 글로벌 OTT 업계의 새로운 트렌드인 니치 마케팅 전략의 전형적인 사례다. 대규모 대중 시장보다는 특정 커뮤니티의 강한 결속력을 중심으로 한 타겟 마케팅이 주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셜미디어에서는 더욱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손흥민의 LAFC 데뷔전 관련 영상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MLS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손흥민의 시카고 파이어 FC 원정경기 교체 출전 영상은 23시간 만에 조회수 110만 회를 기록했다. 이는 메시가 속한 인터 마이애미를 제외한 MLS 다른 구단 콘텐츠가 10만 회를 넘기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수치다.
손흥민 관련 장면들은 팬들에 의해 밈과 리액션 영상으로 재가공돼 전 세계로 확산됐다. 중앙집중형 미디어 소비에서 팬 주도의 분산형 콘텐츠 생산으로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스포츠 경제학의 탄생
이처럼 손흥민의 LAFC 이적은 21세기 스포츠 산업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글로벌 스타의 일방적 수출이 아닌 로컬 커뮤니티와의 유기적 결합을 통한 가치 창출이다. 둘째, 대중적 확산보다 특정 집단의 강한 결속력을 기반으로 한 틈새시장 개척이다. 셋째, 중앙집권적 미디어에서 벗어나 팬이 직접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분산형 구조의 활성화다.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는 이 ‘손흥민 모델’이 다른 도시와 종목으로 확산 될 수 있는지다. 만약 LA에서 새로운 실험이 성공한다면, 손흥민은 단순히 팀을 옮긴 선수가 아니라 글로벌과 로컬을 연결하는 스포츠 산업의 새로운 표준을 만든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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