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에선 만성질환 악화 막는 원동력
장기 로드맵 마련, 국가 투자 확대해야
초고령사회가 도래하면서 건강수명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건강수명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질병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 운동이든 식사든 건강수명을 위한 방법은 다양하지만 질병의 든든한 방패막이자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바로 예방접종이다.
우리나라도 국가예방접종(NIP)사업을 통해 백신접종을 지원하고 있지만 12세 이하 어린이는 총 19종을 지원하고 있는 데 반해 성인은 인플루엔자와 폐렴구균백신 단 두 종류뿐이다. 그 외 성인 백신들은 지자체의 자체 예산을 활용해 소규모로 지원되고 있어 지역 간 형평성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해당 지역에 거주해도 지원내용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의료 패러다임은 이미 치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변화했으며 해외 여러 나라도 성인의 예방접종정책을 강화해 개인의 질병 부담은 물론 국가 의료비 부담을 낮추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우리나라도 영유아뿐 아니라 성인 예방접종 지원을 강화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로 인한 여러 문제들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한자리에서 공론화하고 건강수명 연장을 위한 전략으로서 성인 예방접종의 가치를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주한영국대사관, 주한영국상공회의소, 한국GSK는 12일 주한영국대사관에서 ‘2025 헬시에이징 코리아(2025 Healthy Ageing Korea)’ 포럼을 공동 개최했다.
올해로 2회를 맞은 이번 포럼에선 학계, 정부, 공공단체 등 주요 이해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성인 예방접종, 건강한 초고령사회를 위한 미래전략’을 주제로 발제와 심도 있는 패널 토론을 진행했다.
‘건강수명 연장을 위한 성인 예방접종’을 주제로 첫 발표에 나선 분당서울대병원 노인병내과 김광일 교수는 “성인 예방접종은 단순히 감염병 예방효과를 넘어 나이 들면서 나타나는 여러 만성질환들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방패막”이라며 이는 개인의 질병 부담은 물론 궁극적으로 국가의 의료비 부담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50세 이상에서 발병률이 높은 대상포진을 예로 들었다. 대상포진은 극심한 통증으로 개인 삶의 질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당뇨병, 고혈압, 뇌혈관질환 등을 악화시키는 주범이라는 것. 대상포진백신은 50세 이상부터 접종이 권고되고 있지만 국가예방접종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지 않아 현재로선 약 10만원 이상의 비용을 부담하고 접종해야 한다.
김광일 교수는 “만성질환자가 많은 성인은 감염성질환에 취약하지만 국가필수예방접종 프로그램에 속하는 백신은 많지 않은 실정”이라며 “성인의 예방접종은 여러 만성질환 합병증을 예방해 의료부담과 사망률을 감소시킬 수 있는 만큼 어떤 백신을 지원해 보다 많은 고령층이 접종할 수 있게 할지 정책적 논의의 고삐를 당겨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 이한길 교수는 ‘초고령사회 대응을 위한 성인 예방접종의 가치’를 주제로 성인 예방접종의 사회경제적 효과를 분석하고 해외 정책과의 비교를 통해 국내 성인 예방접종 정책 변화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그의 발표에 따르면 영국은 공공재정을 통해 고령층을 대상으로 대상포진 무료접종을 시행하고 있으며 일본은 올 4월부터 혼합형 재정구조형태로 대상포진 백신 접종을 지원하고 있다.
또 대상포진백신과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백신을 대상으로 국내 성인 예방접종의 비용-편익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대상포진백신의 경우 국내 50세 이상 인구 약 2330만명 중 80%가 접종을 받는다는 가정하에 투입 비용 대비 사회경제적 편익(ROI)이 약 1.52로 나타났다. 접종대상을 60세 이상으로 상향 조정해도 ROI는 1.65로 동일 연령 대상군의 대상포진백신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사회경제적 편익이 기대됐다.
RSV백신은 60세 이상 고령층을 대상으로 할 때 사회경제적 편익이 1.65로 나타났다. 즉 사회경제적 편익이 1을 초과할 경우 투입된 비용보다 더 큰 사회적 편익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한길 교수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백신으로 예방 가능한 질환과 이에 대한 사회경제적 효과를 입증한 기초연구가 부족하고 고령층에서 예방접종이 꼭 필요하다는 인식도 낮은 실정”이라며 “논의만 무성할 뿐 정작 정책으로 반영되고 있지 않은 이유”라고 지적했다.
가장 현실적인 예산문제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한길 교수는 “그렇더라도 지금처럼 자발적으로 예방접종을 하게 한다면 특히 고령층은 정보 접근성, 경제적 여력, 개인의 견해 차이 등으로 접종률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이제 우리나라도 성인 예방접종이 하나의 초고령사회 대응전략이라는 관점을 갖고 장기적인 로드맵을 마련, 적극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패널 토론에선 공공단체와 정부관계자의 목소리도 전달됐다.
대한노인회 송재찬 사무총장은 “예방접종은 건강한 노년을 보내는데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아직도 고령층의 예방접종은 사각지대에 있다”며 “무엇보다 노인들은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어도 언제, 어떤 백신을 접종해야 하는지 정보가 부족하고 비용 부담이라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치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고령층 예방접종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의료비 절감과 건강 형평성 개선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공공투자로 정부의 적극적인 제도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피력했다.
질병관리청 의료안전예방국 예방접종정책과 이형민 과장은 포럼에서 나온 의견들에 충분히 공감을 표하면서도 내부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올해 질병청에 배정된 예산이 1조여원인데 연구에 따르면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대상포진백신 접종을 지원했을 때 약 2조원 이상이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질병청의 예산을 상회하는 비용이 드는 만큼 보건의료계, 산업계 등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빠르면 올 연말 국가예방접종백신 선정기준과 이를 위해 필요한 산업계의 연구자료 등을 자세히 담은 매뉴얼을 대외적으로 발표할 예정”이라며 “질병청 역시 성인예방접종 확대를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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