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금융권이 스테이블코인 시장 선점을 위한 경쟁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정작 입법·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마련되지 않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빅테크부터 페이업체, 가상자산 거래소가 앞다퉈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일부 시중은행까지 발행·유통 인프라에 발을 들이는 등 민간에선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대' 개막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입법·제도적 기반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발행 주체, 자본금 요건, 감독 주체를 둘러싼 정치권·당국 간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규제 공백 속에서 민간 주도의 '속도전'만 과열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금융권·빅테크의 속도전에 비해 제도권 논의가 뒤처지면, 혁신의 이면에 숨어 있는 리스크가 방치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권·빅테크, 스테이블코인 '얼라이언스' 가속
국내 페이업체와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구축을 위해 은행권과의 협력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규제 불확실성, 기술 부담, 신뢰성 확보 등의 장벽을 단독으로 돌파하기 어려운 만큼 전통 금융권과의 연계 모델이 사업 확장의 '안전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페이는 국내 1위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와 조인트벤처(JV) 설립을 모색하고 있으며, 토스도 빗썸 등 다양한 핀테크·거래소와의 제휴를 검토 중이다. 이미 가상자산 입출금 계좌 제휴 경험이 있는 은행들은 스테이블코인 유통망 협력 파트너로 눈독을 들이고 있다. 케이뱅크는 업비트와, KB국민은행은 빗썸과 계좌 제휴를 맺고 있어 구조적 연계가 용이하다는 평가다.
하나은행은 거래소 직접 제휴는 없지만 글로벌 가상자산 커스터디(수탁) 기업인 비트고코리아 지분 25%를 보유하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는 생활금융 플랫폼 '핀크'를 통해 SK텔레콤의 ICT 인프라를 활용한 금융 서비스 고도화를 진행해왔다. 특히 해외송금 시장에서 강점을 지닌 하나은행은 스테이블코인 기반 송금 시 수수료·처리기간 절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카카오그룹도 스테이블 코인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카카오는 카카오뱅크, 카카오페이와 함께 그룹 차원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발행·유통·결제 인프라 전략을 논의 중이다. 앞서 카카오는 2019년 블록체인 자회사 '그라운드X'를 통해 가상자산 '클레이튼'을 발행한 경험이 있다. 현재도 카이아 거버넌스 카운슬에 카카오 계열사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테더와 협력해 카이아 네트워크에 USDT를 발행했다.
카카오그룹은 은행, 결제망, 유통망을 모두 갖춘 국내 유일 대기업으로 평가된다. 카카오톡에 블록체인 지갑을 심고 카카오페이 결제망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탑재하며, 예치금은 카카오뱅크를 통해 수탁하는 '원스톱 구조'가 가능하다. 글로벌 사례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조가 확산 중이다. 페이팔은 자체 결제망을 기반으로 스테이블코인 '페이팔USD(PYUSD)'를 유통하지만, 발행은 규제 라이선스를 보유한 팍소스가 맡는다. 스트라이프는 써클이 발행한 USDC를 자사 결제망에 연결해 지원한다.
글로벌 시장 성장세는 가파르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RWA.xyz에 따르면 5일 기준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2573억달러(약 357조5180억원)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23% 증가했다. 국내 거래량도 크립토퀀트 집계 기준 상반기에만 약 600억달러(약 83조3000억원)에 육박했다. 해외 주요 거래소의 스테이블코인 사용 비율은 84%에 달한다.
법·제도 논의 지연…한국은행 '신중론'과 규제 공백
민간 주도의 속도전에 비해 제도권 논의는 답보 상태다. 한국은행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줄곧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비은행 발행이 확산되면 19세기 미국 민간화폐 발행 혼란이 재연될 수 있다"며 "통화정책 집행이 어려워지고, 최종적으로 중앙은행 시스템으로 되돌아오는 비용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 확산이 통화증발·인플레이션·코인런·외환시장 변동성 확대 등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한은은 당초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2차 실용성 테스트를 연내 추진하려 했으나, 새 정부 출범 이후 비은행 발행 허용을 포함한 입법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참여 은행들의 미온적 태도 속에 일정이 무기한 연기됐다. 대신 '예금토큰'부터 시작하는 단계적 접근과, 발행 인허가 단계에서 통화당국을 포함한 관계기관의 '만장일치' 심사 절차를 도입하자는 방안을 내놨다. 이는 미국의 '지니어스법(GENIUS Act)'이 도입한 스테이블코인 인증심사위원회(SCRC) 모델을 참조한 것이다.
국회에는 현재 4건의 법안이 발의돼 있다. 민병덕·강준현 의원안은 자본금 5억~10억원, 안도걸·김은혜 의원안은 50억원 이상을 발행 요건으로 규정했다. 감독주체, 발행 주체 범위, 준비금 관리 등 핵심 쟁점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통합 과정에서 조율이 필요하다는 평가다. 업계에서는 연말 처리 가능성을 점치지만 정치권 이해관계와 규제당국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으면 더 늦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해외 주요국과 비교해도 한국의 스테이블 코인 제도 도입 속도는 더딘 상황이다. 미국은 지난해 6월 상원에서 '지니어스법'을 통과시켜 민간 주도의 제도화를 본격화했다. 발행규모 100억달러(약 13조8900억원) 이상은 주법 대신 연방규제를 적용받도록 했으며, 발행자·준비금·보고의무 등 엄격한 규율체계를 도입했다.
EU는 2024년 'MiCA'로 단일통화형(EMT)과 복수자산형(ART) 모두에 인가제, 준비금, 보고 의무를 부과했다. 일본은 2023년 지급결제법 개정으로 제도화했으나 상업적 구현이 없어 개선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싱가포르와 홍콩도 이미 법제화를 완료했다.
전문가들은 제도 없이 민간 확장만 진행되면 시장 혼란과 규제 회피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성일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스테이블코인은 저비용 실시간 결제와 Web3 인프라의 핵심이지만 발행자 신뢰, 자금세탁, 금융불안 리스크를 관리할 규율이 부재한 상태다"며 "발행 규모·AML 역량에 따라 규제를 차등화하고, 규제 샌드박스 등을 통한 실증으로 기준을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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