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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종종 그 책이 떠오른다. 이른바 ‘사’자가 들어가는 의사, 변호사, 판검사, 이름만 대면 알법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직원, 공무원까지 상대적으로 더 안정적이고 소득이 높아 ‘좋은 일자리’로 여겨지는 곳에서 일하는 취업자는 전체의 20~25% 수준에 불과하다. 나머지 75% 이상은 중소기업 근로자, 비정규직,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등으로 대부분 임금이 낮고 고용 불안이 높다.
진입 장벽이 높으면 경쟁은 치열해진다.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유아기부터 시작된다. ‘4세 고시’처럼 유아기부터 과열된 사교육은 ‘초등 의대반’으로 이어진다. 대학 서열이 일자리 서열로 이어지는 것을 경험한 부모들은 서둘러 사교육 경쟁에 뛰어들고 초등 의대반이 대변하듯 진로 선택에서 개인의 적성과 선호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 ‘스카이’(SKY) 대학의 자연계 정시 합격자 중 43%가 의대 진학을 위해 입학을 포기한다. 한 TV 다큐는 이를 두고 ‘의대에 미친 한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기엔 국민과 국가가 치르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사교육에 들어가는 가계 부담은 가정을 흔들고 특정 직업군 쏠림은 다른 분야의 성장을 저해한다. 직업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사회적 인식 탓에 청년들은 번아웃을 겪는다. 이를 해결하려면 선호도가 높은 일자리를 늘리고 소득 양극화를 줄이는 한편 근본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먼저, 산업구조를 바꿔 선호도가 높은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인공지능(AI)을 전 산업에 접목해 생산성을 높이고 비즈니스 모델을 혁신하며 신산업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유형의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를 해소하고 기업 간 생산성 격차를 줄여 기업 규모의 차이가 좋은 일자리의 기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대기업의 시장 지배적 지위와 하도급 중심 구조를 과감히 바꿔야 한다. 중소기업의 대기업 전속 거래 관행을 과감히 줄여 중소기업이 독립성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 판로를 개척하는 글로벌 니치(Niche·틈새)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유인해야 한다. 동일 직무 시 처우나 사회 인식에 차이가 없는 환경을 조성하고 기업 규모나 브랜드가 아니라 ‘일의 내용’과 ‘성과’를 중심으로 한 평가 체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근본적으로는 ‘좋은 일자리’에 대한 사회적 재정의가 필요하다.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적정한 소득과 직업 안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일자리가 될 수 있다.
이유를 잊은 채 꼭대기에 오른 애벌레처럼 결국 원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필자 역시 장관직을 마친 지 10년이 지났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여전히 고민한다. 나와 같은 베이비부머는 입시에 매몰돼 살아왔고 사회와 부모가 원하는 길을 따르는 것이 성공이라고 여겼다. 학교나 사회에서 진로 탐색의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에 비해 K팝 등 K컬처와 글로벌 문화를 자양분 삼아 자라난 지금의 젊은 세대는 다양성의 가치를 알고 스스로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 흐름을 정부와 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각자 적성과 장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노동시장과 복지제도를 개편해 경제적 어려움이나 생계불안 없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럴 때 각자 ‘하고 싶은 일’이 ‘좋은 일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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