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7월 반도체 수출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인공지능(AI) 열풍에 따른 고대역폭메모리(HBM)와 DDR5 등 고성능 메모리 수요 확대,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관세 강화 가능성에 대응한 선출하가 맞물린 결과로 분석된다. 산업계는 이번 급증이 실수요 기반의 구조적 반등인지, 정책 변수에 따른 일시적 착시인지에 향후 전략과 해석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난 1일 산업통상자원부 발표한 7월 수출입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반도체 수출은 147억1000만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31.6% 증가, 월간 기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전체 수출도 608억2200만달러로 5.9% 늘었다. 반도체는 전체 수출의 24.2%를 차지하며 13개월 연속 증가세를 이어갔다.
다만, 이번 실적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고부가 제품 수요 증가에도 불구하고, 제조단 수익성은 제약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HBM 등 고부가 제품의 수요는 뚜렷하게 늘고 있지만, 수율 안정화와 공정 전환 속도 등 제조 측 변수로 인해 이익 실현은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실적을 ‘단가 회복’이 아닌 ‘전략적 시점 조절에 따른 출하 집중’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실제로 한 반도체 부품 업계 관계자는 “많이 팔았기보단, 지금 팔 수 있을 때 최대한 팔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시장 표면상 물량은 증가했지만, 이익 구조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양상이다. 삼성전자 DS부문은 2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93.8% 감소한 4000억원에 그쳤다. 출하 확대에도 불구하고, 범용 제품 중심 판매로는 수익성 반등이 어려운 구조적 한계가 확인된 셈이다.
이런 가운데 고부가 메모리를 중심으로 한 전략 전환이 업계 대응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AI 서버용 GPU에 탑재되는 HBM3E 등 차세대 메모리는 AI 연산의 필수 부품으로 자리 잡았다. 단순한 범용 DRAM 공급이 아니라, 전략 고객 맞춤형 수주 중심의 고부가 산업으로 전환되는 흐름이 뚜렷하다.
삼성전자도 HBM3E를 중심으로 한 로드맵을 예정대로 추진 중이다. 최근에는 테슬라와 약 165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급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파운드리 부문을 포함한 전략 고객 대응 체계를 통해 수주형 수익 모델을 강화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업계 최초로 HBM4 샘플을 주요 고객사에 공급하며 시범 양산 체제에 돌입했다. 12단 적층 기술을 기반으로 엔비디아 등 글로벌 AI 수요처와의 협력도 강화, 기술력 선점을 바탕으로 고성능 메모리 시장 내 주도권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내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면서 수요 확장세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들은 3분기부터 주요 빅테크 기업들의 인프라 투자가 본격화하면서 GPU와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연쇄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실수요 기반의 흐름도 일정 부분 반영됐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글로벌 수요 회복 흐름은 지역별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중국의 2분기 스마트폰 출하량은 전년 동기 대비 감소, 유럽은 경기 둔화로 IT 투자 심리가 위축됐다. 공급처가 AI·서버 시장에 편중된 상황에서 특정 수요군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향후 공급 과잉과 가격 하락 등 구조적 리스크로 전이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처럼 수요 불균형과 공급 리스크가 병존하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미국의 대중 반도체 관세에 대외 불확실성이 컸지만, 기업들이 총력을 다한 결과 6월에 이어 수출 증가 흐름을 이어갈 수 있었다”며 “대미 협상에서 관세 수준이 경쟁국과 유사하거나 낮게 유지돼 우리 기업이 미국 시장에서 동등하거나 우위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부도 단기 수출 호조에 기대기보다는 수출 구조 자체의 ‘리디자인’에 나섰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반도체 등 국가 전략 품목을 대상으로 수출보험·보증 확대, 패키징 인프라 투자 강화, 반도체 특별세액공제 개편 등을 병행하고 있다.
한국무역보험공사는 수출 중소·중견기업의 금융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고위험 시장 대상 특별보증 프로그램을 운영, 산업부는 광주와 용인을 중심으로 고부가 패키징 테스트베드 조성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도체 세액공제는 올해부터 R&D 최대 50%, 시설투자 최대 25%까지 적용되는 개편안이 시행 중이다.
정부는 단순한 물량 중심 대응에서 벗어나, 기술 내재화와 공급망 전환 역량을 높이는 쪽으로 전략축을 옮기는 분위기다. 특히 대외 변수에 민감한 반도체 산업 특성을 고려해 공급 타이밍뿐 아니라 공급 구조 자체를 유연하고 안정적으로 설계하는 능력을 중장기 생존 조건으로 보고, 기술 기반의 수주형 수출 구조 정착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지금의 경쟁은 단순히 많이 생산하고 공급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수요를 언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까지 설계할 수 있는 역량의 싸움”이라며 “시장 변화에 따라 공급 타이밍을 조율하고, 기술력에 기반한 맞춤형 수주 체계를 갖추는 것이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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