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바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생존 경쟁이 벌어진다. 그중에서도 조용히 해양 생태계를 지키는 특별한 존재가 있다. 환경부가 8월 멸종위기 야생생물로 선정한 ‘나팔고둥’이다.
나팔고둥은 제주 해역이나 남해 연안에 살고 있지만,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들어진 귀한 생물이다. 그러나 종종 횟집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유는 횟집 주인이나 현지 어민 모두 나팔고둥이 보호해야 할 멸종위기 생물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팔고둥에 대한 사람들의 인지가 부족한 상황이다.
불가사리를 먹는 유일한 고둥
나팔고둥은 무려 30cm까지 자라는 대형 연체동물이다. 한국에 서식하는 고둥 중 가장 크고, 이름처럼 예전에는 껍데기에 구멍을 뚫어 나팔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 왕실 행차나 군대 행진 때 불던 악기 ‘나각’이 바로 이 고둥 껍데기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고둥이 바다에서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주식이 불가사리다. 나팔고둥은 하루에 한 마리 이상 불가사리를 먹으며, 3시간이면 한 마리를 처리한다. 보통 고둥류는 불가사리에게 잡아먹히기 십상이지만, 나팔고둥은 오히려 포식자다. 독 가시를 두른 악마 불가사리조차 치설로 갉아 먹는다.
불가사리는 천적이 거의 없는 해양 무법자다. 갯벌과 암반을 가리지 않고 산호, 조개 등을 마구 먹어 치운다. 이 때문에 바다 사막화를 유발하는 생물로 꼽힌다. 그 불가사리를 통째로 삼키는 나팔고둥은 해양 생태계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한때는 흔했지만… 이제는 제주 근해에서만
나팔고둥은 경남·경북 연안과 제주도 일대에 주로 서식했다. 서식 수심은 10~200m로, 제주에서는 보통 20m 내외의 얕은 암반 위에서 주로 발견됐다. 조간대부터 깊은 바다까지 활동 반경이 넓고, 불가사리 외에도 해삼 등 극피동물을 먹고 산다. 산란은 12~4월까지 이어지며, 적정 수온은 약 15도 내외다.
몸은 원뿔꼴, 꼭지 부분은 주홍색, 아랫부분은 황색 바탕에 갈색 격자무늬나 회백색이 퍼져 있다. 껍데기 주둥이 안쪽은 흰색이며, 입술은 두껍고 벌어져 있다. 뚜껑은 각질로 되어 있어 단단하다.
과거 제주, 여수 등에서는 그리 귀하지 않았다. 껍데기의 아름다운 무늬 덕분에 관상용으로도 인기를 끌었고, 살짝 데치거나 삶아 무쳐 먹는 식용 고둥으로도 자주 이용됐다. 심지어 껍데기를 조개 공예나 장난감 재료로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멸종위기 인식 부족으로 인한 채집, 해양 오염, 수집욕 등이 겹치면서 개체수가 급감했다. 나팔고둥이 사라진 해역에서는 불가사리가 폭발적으로 번식하면서 생태계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보호종임에도 불법 유통 여전
나팔고둥은 2012년 5월 31일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지정됐다. 환경부와 해양수산부가 동시에 관리하는 국가 보호종이다. 법적으로 포획, 채취, 훼손, 판매가 모두 금지돼 있다. 이를 위반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상~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하지만 문제는 식용 고둥을 채집하다가 나팔고둥을 일반 고둥으로 착각해 포획하거나 불법 유통하는 사례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가 아니면 껍데기 구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팔고둥은 인공 사육도 어렵다. 먹이를 먹을 때 독성 점액을 다량으로 분비하는 특성 때문에 양식이 불가능하다. 복원 프로그램도 난항을 겪고 있어 자연 서식지 보호가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현재 나팔고둥은 제주 남부 해안과 한려해상국립공원 일대에서 간헐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국립생물자원관과 국립생태원 누리집에서는 이와 관련된 자료를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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