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해방촌에 위치한 무자기 쇼룸 내부.
수많은 식기가 흰색을 띠는 까닭은 캔버스가 흰색인 이유와 같다. 무한한 포용력 덕이다. 하얀 그릇은 어떤 먹거리도 너그러이 품는다. 단순히 음식을 담는 용기(容器)를 넘어 색과 형태를 돋보이게 하는 백자 그릇도 있다. 심보근 도예가의 무자기도 그중 하나다. ‘무작위’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이름처럼 무자기의 그릇은 기교를 부리거나 젠체하지 않는다. 그리 보이는 연원은 우선 색이다. 무광 백자는 밤새 내린 눈이나 곱게 간 쌀가루처럼 뽀얗다. 차가운 흰빛이 차분하고 과묵하다. 반면 유광 백자는 오묘한 푸른빛이 감돌아 청아한 맛을 낸다. 무광 그릇보다 더 편안하게 다가갈 법하다. 이 밖에 자연물을 본뜬 균형미와 산뜻하게 가벼운 무게, 세련되고 매끈한 만듦새 덕에 선뜻 손이 간다. 일상의 식탁에 스스럼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 같은 편안함은 무자기를 만든 도예가 심보근을 닮았다. 향을 향한 애정을 오래 품어온 그는 최근 프레이그런스 브랜드 토아이를 론칭했다. 무자기와 카페 무원, 토아이에 이르기까지 일상에 스며드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그와의 대화 역시 편안하게 흘렀다.
1 토아이의 오 드 퍼퓸 ‘파인드미’. 시향용 세라믹 오브제 역시 무자기 제품이다. 2 서울 역삼동의 카페 무원. 3 무자기 쇼룸에서의 심보근 도예가.
도예를 시작한 스토리가 흥미로워요. 처음 고등학교 세라믹 디자인과에 진학했을 때 자퇴하고 싶었을 정도였다고요. 언제 이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나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대부분 ‘어쩌다 보니’ 하게 되는 것 같아요(웃음). 원래는 디자인 고등학교에서 실내 건축 디자인이나 제품 디자인 전공을 지망했어요. 그러다 후순위였던 세라믹 디자인과에 진학했는데, 당시 도자기라는 매체가 제게는 올드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학교 수업에서 조금씩 경험하며 매력을 느꼈어요. 어려서부터 손으로 하는 작업을 잘해서 칭찬받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어요.
‘무자기’ 하면 떠오르는 디자인 특징이 있죠. 초반에 무자기의 색깔을 정립해간 과정이 궁금해요.학생 시절부터 백자를 워낙 좋아해서 꼭 만들고 싶었어요. 흰색은 어디에 둬도 자연스럽고 뭘 담아도 어울리는 색이니까요. 무광과 유광 유약 중에서도 고민했어요. 다만 무광은 흠집이 잘 나니까 유광을 고르는 식의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무광은 무광대로, 유광은 유광대로 특징을 살리고 싶어 미세한 컬러 차이를 두었죠. 무자기의 무광 그릇은 새하얀 백색인 반면 유광은 약간 푸른빛이 돌아요. 소비자에게 차선책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 했어요.
흰색을 무(無)의 색이라 여기지만 물성을 지닌 세라믹에서는 그렇지 않죠. 무자기의 무광 백자는 겨울 눈처럼 차가운 흰색으로 느껴져요. 미묘한 색온도를 어떻게 결정했나요? 수많은 테스트를 거친 끝에 지금의 색이 탄생했어요. 무광 도자기의 광택을 결정짓는 표면 처리는 아주 까다로운 과정이에요. 온도가 조금만 높으면 지나치게 광택이 돌고, 온도가 낮으면 너무 매트하게 나오거든요. 빛 아래서 보면 모래사장의 모래처럼 은은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질감을 내려 노력했어요. 그래서 무자기다운 백색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어요.
무자기가 강조하는 점 중 하나가 실용성이에요. 실제 사용하며 느낀 점을 반영했을 것 같은데요. 무거운 그릇을 싫어해서 최대한 가볍게 만들려고 했어요. 또 개인적으로 쓰이지 않는 물건을 지루하게 느껴요. 그래서 실제 사용성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컵은 아주 얇게 완성했는데, 얇은 림이 입술에 닿을 때의 매력을 소비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거죠. 밥그릇 사이즈는 제가 평소에 먹는 햇반의 무게 210g에 정확하게 맞춰 만들었어요. 소주를 마실 때는 가정에서도 업소용 소주잔을 사용하잖아요. 어느 날 다 같은 잔에 소주를 마시는 게 이상하더라고요.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뭔가 시도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네 가지 잔을 개발했어요. 형태는 다르지만 동일한 용량을 담을 수 있는 잔이에요.
1 스테인리스로 제작한 디저트 포크. 2 토아이 디퓨저 ‘A. B. C’. 바질과 유자의 싱그러운 향을 담았다. 3 무자기의 멀티 프레이그런스와 세라믹 사셰.
그렇다면 관상용으로 존재하는 오브제를 만들고 싶은 열망은 없나요? 화병을 만든다면 꽃이 꽂혀 있는 모습이 예쁜 화병이면 좋겠고, 그릇도 무언가 담았을 때 아름답길 원해요. 하지만 실용적이기만 하면 지루하잖아요. 화려하기만 해도 피곤하고요. 늘 중간에서 균형을 맞추려 합니다.
무자기의 커틀러리에는 스테인리스와 자개를 활용했습니다. 한국적인 소재라면 나무를 떠올리기 쉬운데 차가운 소재인 스테인리스를 택한 점이 흥미로워요. 커틀러리는 재미로 시작했어요. 접시에 곁들이는 포크나 집게는 생각보다 예쁜 걸 찾기 어렵더라고요. 그렇다면 우리 그릇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출발했어요. 나무 스푼도 언젠가 만들어보고 싶지만 시중에 이미 예쁜 제품이 넘쳐나기에 지금 단계에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어요. 한편 스테인리스는 안전한 동시에 흠집이 잘 나는 소재예요. 사용하는 대로 결이 남는 특성이 도자기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도자기는 깨지는 것이 쓰임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했죠. 오래 사용할 그릇을 만드는 도예가의 생각으로는 의외인데요.깨졌다는 것은 사용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라고 여겨요. 장식장에 올려두고 감상만 하면 깨질 일이 거의 없겠죠. 그런데 깨졌다는 건 그만큼 많이 사용했고 아꼈던 물건이라는 뜻일 테니까요.
1 공간을 채우는 무자기의 인센스 스틱. 2 대표 제품인 꽃 접시와 볼. 3 새롭게 출시된 플룸 볼 밥그릇과 국그릇.
최근 향을 다루는 브랜드 토아이를 론칭했어요. 무자기 홈 라인을 통해 프레이그런스를 출시했는데, 별도 브랜드를 기획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은 갈증이 컸어요. 무자기에서 소개해도 좋지만 향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무자기를 활용하면 진정성이 흐려질 것 같았죠.
어릴 적부터 향에 민감했나요?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음식 간을 잘 봐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댁을 가면 항상 간 보기를 담당하던 아이였어요. 향 제품을 사는 것도 좋아했고요. 향이라는 매개체는 참 독특해요. 무의식중에 순간을 기억하고, 사람을 기억하게 하니까요.
향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직접 만들고 싶다는 열망은 언제 피어났나요? 디퓨저나 캔들, 인센스 피우는 행위를 왜 좋아할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향이 공간을 분리한다고 느꼈고, 나아가 그 사실이 위로가 되더라고요. 토아이의 스토리도 거기서 출발했어요. 인간이 향을 피우는 이유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요. 나만의 섬을 찾아 그 속에 숨으려는 본능과 향의 특성이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토아이는 특출나기보다 일상에 스며드는 향을 추구했다고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향을 완성했나요? 직원들이 제 취향대로 만드는 게 아니냐 할 정도로 취향을 99% 반영했어요(웃음). 앞으로 더 다양한 향을 선보이겠지만 시작 단계에서는 제가 좋아하는 향을 만들고 싶었죠. 그래서 대부분 우디 계열 향이 깔려 있고요. 우디 향이 맵거나 강하지 않고, 플로럴한 향과 어우러지는 따뜻한 향에 가까워요.
최근 무자기에서 둥근 꽃 모양의 플룸 볼 밥그릇과 국그릇을 출시했습니다. 어떻게 탄생한 제품인가요? 밥그릇과 국그릇은 누구나 갖고 있는 기본 그릇이라 가장 만들기 어려워요. 그렇기에 도예가라면 욕심 내는 그릇이기도 하죠. 브랜드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단계에서 다시 한번 무자기다운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아이템으로 기본 그릇을 작업해봤어요. 너무 과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으면서 매일 사용할 때 부담스럽지 않은 형태를 고민하다 보니 10개 넘는 버전을 디자인했더라고요. 잎을 더하거나 줄이고, 잎 사이 굴곡을 넣었다 없앴다, 꽃잎의 둥근 부분을 깊게 했다 얕게 했다 많은 수정을 거쳤죠. 근래 작업한 디자인 가운데 가장 무자기다웠다고 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무자기와 토아이의 올해 계획이 있다면 들려주세요.무자기라는 단어가 라이프스타일의 대명사처럼 쓰였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일상 속 쓰임을 고민하며 물건을 만들어나갈 거예요. 토아이 역시 무자기처럼 향이 어떤 역할과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성장해나가려 해요. 하반기에는 토아이의 모든 제품을 만날 수 있는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할 예정이에요. 그전까지는 온라인과 카페 무원, 그리고 새로운 팝업을 통해 고객과 만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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