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외교는 더 이상 정부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국가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그 중심에 경제가 놓이면서 기업인, 특히 대기업 총수의 역할은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 극적 타결은 그 상징적 사례로 남을 것이다.
미국과의 상호 관세율 25%에서 15%로의 인하. 숫자로만 보면 단순한 조정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번 협상이 타결되기까지 그 뒤에는 막대한 산업적 이해와 외교적 설득, 그리고 자발적으로 움직인 국내 주요 기업 총수들의 ‘민간 외교’가 있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28일 가장 먼저 워싱턴에 도착했다. 한화오션이 인수한 미국 필리조선소를 매개로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의 실현 가능성을 설명하고 미국 조선업 재건에 한국이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미국이 반도체 다음으로 주목하는 것이 방산과 조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김 부회장의 선제적 대응은 단순한 투자 이상의 상징성을 가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9일 방미했다. 미국 내 370억 달러 이상을 투자 중인 삼성전자는 이미 기술력과 물량 면에서 미국 반도체 산업의 실질적 협력자다. 여기에 더해 이 회장은 테슬라와의 23조 원 규모 공급 계약을 이끈 장본인으로, 방미 시점과 맞물리며 강력한 신호를 미국 정계에 보냈다. 삼성의 투자는 단순한 팹(fab) 운영이 아니라, 미국이 원하는 ‘첨단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이라는 메시지였다.
마지막 퍼즐을 맞춘 이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다. 자동차 산업은 관세의 직격탄을 맞는 분야였다. 지난 4월부터 부과된 25%의 자동차 관세는 현대차의 2분기 실적을 20% 가까이 끌어내렸고, 미국 내 생산 확대가 없이는 경쟁력 유지가 어렵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정의선 회장은 지난 3월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해 210억 달러의 투자 계획을 직접 밝힌 바 있다. 이번에도 다시금 그의 방미는 “우리는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는 직접적 메시지를 던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 가지다. 누구도 ‘지시’를 하지 않았지만, ‘지체 없이 움직였다’는 점이다. 대통령실조차 "요청한 적 없다. 기업들이 스스로 결정했다"고 했다. 자발적 방미, 자발적 메시지, 자발적 조율. 민간이지만 사실상 외교의 전면에서 정부를 보조하며, 협상 테이블의 신뢰 자산을 만들어준 셈이다.
단기적으로는 관세율 인하라는 ‘성과’가 남았다. 그러나 더 큰 메시지는 따로 있다. 바로 “한국은 국가와 기업이 함께 움직인다”는 이미지다. 일본과 EU가 한 발 먼저 미국과 관세 협상에서 가시적 성과를 냈지만, 한국의 민관 ‘원팀 외교’는 적시에 정확한 압박을 가하며 마지막 순간에 판을 뒤집었다.
‘총수 외교’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전략이다. 국제사회에서 기업은 국격의 일면이며, 투자 유치는 군사 동맹만큼 실리를 결정한다. 특히 반도체, 전기차, 방산처럼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산업일수록 민간의 전략적 협상력은 그 자체로 ‘국력’이다.
이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정부는 무엇을 할 수 있나?”보다 “정부와 기업이 어떻게 함께 움직일 수 있나?”로.
오늘의 ‘방미 총수 외교’가 외교사에 남을 ‘신(新) 국가전략 모델’의 시작이 되길 기대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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