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전시현 기자 | 스테이블코인이 안정성과 국경을 넘나드는 신속성을 무기로 국제 금융시스템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바로 그 특성이 해커들의 범죄수익 세탁 통로로 악용되면서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31일 미국의 블록체인 분석기업 체이널리시스(Chainalysis)에 따르면 북한 해커 조직은 탈취한 가상자산을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해 추적을 피하는 수법을 핵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달러 가치에 연동돼 ‘디지털 달러’로 불리는 스테이블코인의 초국경·탈중앙 특성을 악용한 것이다.
스테이블코인 자체가 해킹 대상은 아니지만, 그 존재 만으로 다른 거래소나 금융 프로토콜을 해킹할 유인이 생기는 셈이다. 도둑질한 장물을 손쉽게 현금화할 수 있는 ‘고속도로’가 열린 격이다. 세계 최초로 가상자산 송금 실명제(트래블룰)를 도입하며 규제 선도국을 자처한 한국이지만, 진화하는 범죄 수법 앞에 K-규제의 실효성이 시험대에 올랐다.
◆ 北, 수조원 훔쳐 ‘디지털 장물’ 세탁···믹서·브릿지로 추적망 무력화
국제 제재로 고립된 북한에 가상자산 해킹은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자금을 조달하는 핵심 창구다. 체이널리시스의 ‘2025 가상자산 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가상자산 해킹 피해액 22억달러 중 61%인 13억4000만달러(약 1조9000억원)가 북한 소행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주된 자금 세탁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초기에는 여러 주소의 자금을 한데 섞어 출처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크립토 믹서를 주로 사용했다. 대표적 믹서인 토네이도 캐시는 북한 해킹 조직 라자루스가 6억2500만달러 규모의 ‘로닌 브릿지’ 해킹 자금을 세탁하는 데 사용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2022년 8월 미 재무부의 제재 명단에 올랐다.
제재로 믹서 사용이 어려워지자, 이들은 곧바로 서로 다른 블록체인 네트워크 간에 자금을 이동시키는 ‘크로스체인 브릿지’로 눈을 돌렸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엘립틱(Elliptic)에 따르면, 라자루스는 2022년 7월부터 1년간 크로스체인 브릿지를 통해 9억 달러 이상의 암호화폐를 세탁했다. 이 방식은 자금의 흔적을 여러 블록체인 장부에 조각내기 때문에 기존의 추적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 ‘세계 최초’ 규제에도···韓, ‘입법 공백’에 발목 잡히나
국경 없는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가상자산 송금 시 송수신자 정보를 확인하는 ‘트래블룰’을 권고했다. 한국은 2022년 3월 세계 최초로 이를 전면 시행하며 규제 선도국으로 나섰다. 하지만 국가별 도입 시점이 달라 규제 공백이 생기는 ‘선라이즈 이슈’로 인해, 범죄자들은 규제가 약한 국가의 거래소를 세탁 경유지로 악용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국내에 있다. 2021년 3월 시행된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은 거래소의 자금세탁방지 의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50조원대 피해를 낳은 ‘테라·루나 사태’에서 보듯, 문제는 발행사에서 터질 수 있지만 이에 대한 규제는 전무한 실정이다.
이를 보완할 2단계 입법은 스테이블코인 규제 관할권을 두고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이 힘겨루기를 하면서 수년째 표류하고 있다. 미국이 발행사에 은행 수준의 규제를 적용하는 ‘지니어스 법안’을 추진하고 , 유럽연합(EU)이 포괄적 시장규범인 ‘MiCA’를 시행하는 등 세계 각국이 규제 틀을 완성해나가는 동안 한국은 ‘규제 공백’ 상태에 놓인 것이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규제 공백이 장기화되면 준비자산 신뢰 훼손 시 '코인런'(대규모 인출 사태) 등으로 금융시장 불안이 커질 수 있다. 안전장치가 없기 때문에 시장 충격이 은행 유동성 위기나 자본유출로 번질 위험이 있으며, 이용자는 자산 손실에 취약해 질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술적 오류나 사기·범죄 악용, 통화정책의 유효성 저해 등 금융 안정성과 소비자 보호 모두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관련 법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Copyright ⓒ 한스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