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원 아카이빙] 직선과 원① 선형과 순환의 시간에 이어
[문화매거진=정서원 작가] 동아시아 회화 형식에서도 이 시간 인식은 뚜렷이 드러난다. 병풍, 두루마리, 민화, 족자, 괘불 등의 형식은 단순한 시각 이미지의 틀을 넘어 시간의 구조 자체를 시각적으로 조직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두루마리는 순차적으로 펼치며 감상하는 형식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선을 이동시키고, 병풍은 접고 펴는 구조를 통해 열리고 닫히는 시간, 즉 의례적 반복과 개폐의 시간 구조를 형상화한다.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단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예술의 구조이며 문화적 실천이다. 동아시아의 회화와 의례는 시간을 흐름이자 되풀이로 이해하며,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 위에서 만들어진다.
시간을 반복되는 것으로 인식할 때, 죽음은 더 이상 절대적인 단절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시 돌아오는 존재를 위한 문턱이자 일정한 시점마다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일상의 일부가 된다. 동아시아의 제의 문화는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구성된다. 해마다 열리는 제사, 정기적으로 수행되는 불교 의례, 그리고 각종 민속 신앙 속에서 죽은 자는 다시 현재로 호출되며, 공동체는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형식과 장치를 마련한다.
가장 분명한 예는 조상 제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유교적 제사 체계는 죽은 조상을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난 존재로 보지 않고,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반복적으로 모시는 존재로 규정했다. 죽은 이는 영원히 떠난 존재가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는 손님이며, 그 귀환은 정해진 절차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산 자는 이 의례를 통해 죽은 자를 맞이하며, 동시에 삶의 질서를 정비한다. 제사는 개인의 정서적 위로를 넘어 공동체가 시간의 흐름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재구성하는 사회적 장치로 작동한다.
이러한 반복 구조는 민속 신앙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일본의 오본(お盆)은 음력 7월 중순 무렵 열리는 조령제(祖靈祭)로, 조상의 혼백이 이승으로 돌아온다는 믿음에 따라 불을 밝히고 영혼을 맞이한다. 일정한 시기에만 열리는 이 의례는 영혼의 귀환이 일시적이지만 반복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시간 구조를 보여준다. 영혼은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매년 정해진 시간에만 다시 만날 수 있는 존재이며, 이는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의 리듬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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