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장마와 폭염이 반복되는 여름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몸은 무겁고 마음마저 허해지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기교 넘치는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 담백하고 정이 묻어나는 우리 곁의 식재료가 간절히 생각난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잘 익은 옥수수를 손에 쥐고 한입 베어 물면, 쫀득한 식감과 구수한 단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푸르른 들판, 솥뚜껑 위로 피어오르는 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길 같은 풍경도 함께 떠오른다. 옥수수는 평범해 보이지만, 세월과 지혜가 응축된 여름의 식탁 위 진짜 보물이다.
17세기 안데스산맥을 넘어 이 땅에 뿌리 내린 옥수수는 곧 우리네 또 하나의 삶이 됐다. 보리 외에 대체 작물로 자리 잡아 농한기에는 간식을, 보릿고개나 흉년에는 구황식품을 대신했다.
더위에는 삶아 먹고, 가을엔 말렸다가 해 먹는 등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귀한 양식이었다. 식재료 하나로 밥·죽·전·묵·떡·차·물엿·술까지 다양한 음식이 태어났고, 그중에서도 '올챙이묵'은 여름날 밥상에 소박한 별미였다.
옥수수풀을 삶아 녹말 물을 내고, 바가지로 떠 시원한 우물물 위에 흘리면 하얀 묵이 올챙이처럼 뽑혀 나와 한여름 입맛 없는 때에 냉국으로 곁들였다.
오늘날 과학은 옥수수가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건강식품임을 재확인했다. 비타민 B군, 칼륨, 루테인과 제아크산틴, 특히 풍부한 식이섬유는 장 건강에 탁월하고, 피로 해소, 항산화, 눈 보호 등 여러 방면에서 유용하다.
옥수수에 든 수용성 식이섬유는 과일을 능가하듯 장운동을 돕고, 변비 예방에도 탁월하다. 더불어 약선에서는 옥수수를 '식약 동원' 곡물로 귀히 여겨왔다. 위장을 편안하게 하고, 체내 습기를 몰아내며, 부종을 줄이고, 심신의 안정까지 돕는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옥수수수염은 오랜 전통 속에서 해독·이뇨·혈압 관리에 널리 활용됐다. 여름철 빠져나가는 기운을 단단히 붙잡고 기력을 보충해주는 데 옥수수 한 개만 한 식재료가 드물다.
7~9월, 가장 달고 알질 때 맛보면 제철의 보드라운 식감과 자연의 에너지가 한껏 느껴진다. 더위에 지쳐 입맛마저 잃었을 때, 잘 쪄낸 옥수수 한 입이 새 힘을 불어넣는다.
어린 시절, 뙤약볕 아래 무성히 자란 텃밭의 옥수수는 내 키보다 훌쩍 컸다. 언제나 어머니는 붉은 수염이 늘어진 옥수수를 따서 부엌으로 들어오셨다.
껍질을 벗기며 알을 톡톡 튕기는 그 손끝, 우물가에서 묵직하게 헹군 옥수수 알갱이들은 곧 부침 반죽으로, 갈린 전분은 묵으로 변신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솥에 옥수수 녹말을 얼마간 넣고 물과 소금을 더한 뒤 뜸을 들이며 저어가는 어머니의 손길은 쉼이 없었다.
"묵은 주걱에 힘을 실어야 탱글탱글해진단다."
어머니의 말씀과 동작을 지금도 기억한다. 묵이 끓어오르면 바가지에 담아 구멍을 통해 우물 찬물에 흘리면, 하얀 묵 가닥이 '올챙이'처럼 우물물 속에 떠돈다. 부친 옥수수전에는 깻잎, 고추, 옥수수 건더기가 넣어지고, 올챙이묵은 오이, 마늘, 간장 양념 냉국에 담겼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 먹으면 더위도, 속상한 마음도 다 사라진다. 여름엔 양기를 밖으로 풀어야 마음도 시원해진단다."
어머니의 옥수수는 계절과 산물에 대한 존중, 가장의 근심과 아이들 건강까지 아우른 보살핌, 생활의 예술이자 지혜였다. 웃음과 땀이 배는 그 밥상은 삶의 단단한 뿌리로 남았다.
손자병법에서 '화공'(火攻)이란 불을 사용해 전세를 바꾸는 전략이다.
하지만 아무 때나 쓰지 않는다. 손자는 "불은 반드시 시기를 보아야 하고, 바람을 살피고 알맞을 때 써야 한다"고 했다. 옥수수 역시 그 타이밍이 필수다. 한여름, 제철 옥수수에 적당한 불을 더하면 단맛과 영양이 최고조에 이른다.
이때가 바로 손자가 말한 '화공의 시기'이자, 건강과 맛 모두를 잡는 결정적 타이밍이다.
옥수수는 밥, 죽, 묵, 전, 엿, 술, 차 등으로 다양한 변신을 한다.
순수하게 삶거나 쪄낸 옥수수(화인), 밥·죽으로 소화력 높이는 요리(화적), 갈아내 부침·떡·떡갈비로 변형(화치), 물엿 등 저장요리(화고), 차·묵·술(화대)까지 '화공오법'에 비유해볼 수 있다.
불을 만나야 비로소 완성되고, 각기 상황에 맞는 음식으로 밥상의 '전장'을 지켜준다.
중요한 건 어떤 때, 어떤 불로 조리하느냐이다. 불을 준비하는 것만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제철에 맞춰, 어머니의 정성처럼 불을 제대로 더해야만 허기를 채울 고소한 보약, 마음을 달래는 밥상이 된다.
지금, 이 순간이 옥수수를 삶고 찔 '천시'다. 무더위와 피로, 먹먹한 일상에 지쳤다면 제철 옥수수로 작은 밥상을 차려보라. 단순한 곡물을 통해 계절을 이기고, 지혜와 추억, 그리고 건강을 회복하는 포근한 여름의 승부가 시작될 것이다.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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