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국내 주요 제약사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체계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ESG 위원회 신설, 평가등급 획득 등 외형은 갖췄지만 정량 지표와 사업 전략 연계 수준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탄소 감축, 환자 접근성, 공정 약가 등 사회적 책임 영역은 선언에 머물고 R&D·공급망과의 연계도 부족하다는 평가다.
한국ESG기준원(KCGS)이 발표한 2024년 상장 제약·바이오 기업 ESG 평가에 따르면 전체 60여 개사 중 A+ 등급을 받은 기업은 3곳에 불과했다. A 이상 등급으로 범위를 넓혀도 14~17곳 수준에 머물며 상위권 기업은 제한적이다. 특히 환경(E)과 사회(S) 부문에서 B+ 이하 등급을 받은 기업이 다수에 달해 지배구조(G)를 제외한 핵심 항목에서 취약성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ESG 평가 항목 가운데 ‘탄소 감축 목표 명시’나 ‘취약 계층 대상 약가 접근성 프로그램 보유’ 등 실질적 가치 요소는 여전히 이행률이 낮다. 직접 배출(Scope 1)과 전력 사용에 따른 간접 배출(Scope 2)은 일부 관리되고 있으나, 공급망 등에서 발생하는 Scope 3 공시는 대부분 미흡하다. 국내 제약사들은 ‘위원회 설치’나 ‘보고서 발간’ 등 선언적 조치에 치우쳐 있고, ESG를 경영 전략에 내재화하려는 구조적 접근은 아직 제한적이라는 시각이다.
반면, 글로벌 제약사들은 ESG를 경영 핵심 지표로 삼고 있다. 화이자는 2019년 대비 Scope 1·2 온실가스 배출량을 13.9% 감축, 2030년 46% 감축과 204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한다. 45개 저소득국에 필수 의약품과 백신을 무상 또는 비영리 가격으로 공급 중이다. 노바티스는 열대병 등 공중보건 수요가 큰 분야에 R&D를 집중, 사노피·GSK 등도 공급망 기반 감축 및 ESG 리스크 통합 공시를 추진하고 있다.
국내 제약사별 대응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유한양행은 국내 5대 제약사 가운데 ESG 평가에서 가장 높은 등급을 받았다.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로부터 AA 등급을 획득, 이사회 산하에 ESG 위원회를 설치해 지배구조(G) 부문에서 선도적 행보를 이어가는 가고있다.
탄소 감축 로드맵과 환자 접근성 확대 계획을 수립했지만, 환경(E)·사회(S) 부문에서의 정량적 목표 설정은 일부 항목에 국한된다. 공급망을 포함한 Scope 3 배출량은 일부 공시가 이뤄졌으나, 전체 배출량 산정과 전략적 감축 계획은 아직 초기 단계다.
GC녹십자는 국내 5대 제약사 중 유일하게 환경 부문에서 중장기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2030년까지 2021년 대비 Scope 1·2 배출량을 42% 감축, 2050년까지 탄소중립(Net Zero)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WHO의 사전적격성(PQ) 인증을 받은 수두 백신 ‘배리셀라’ 등을 개발·공급하며 사회적 책임 이행에도 나서고 있다. 다만, 국내 환자 접근성 확대나 약가 정책과 같은 사회 부문의 정량적 성과 지표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아 개선 여지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JW중외제약은 ESG 경영을 연구개발(R&D) 전략과 연계해 추진하고 있다. ESG 보고서를 통해 희귀질환 치료제 개발을 비재무적 가치 창출의 하나로 제시. 관련 파이프라인 현황을 간략히 공개하고 있지만, ESG 가치 반영 R&D 투자 비중이나 지속 가능성과 연계된 성과 지표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 외부 인증 기준에 따른 공시 체계도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정량성과 전략 연계에서 미흡하다는 지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일부 제약사는 환경 데이터 공시나 사회 가치 확장 등 실질 대응을 강화, 초기 한계를 보완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대웅제약은 탄소배출량과 폐기물 재활용률 등 환경 데이터를 자발적으로 공시하고,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40% 감축 및 2050년 탄소중립(Net Zero) 달성을 목표로 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했다. ESG 전략을 환경 중심에서 점차 사회적 가치 영역으로 확대하는 조짐이 진행되고 있다.
ESG 공시 체계 구축에서 대응이 다소 늦은 편이었던 종근당 2023년 그룹 첫 통합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며 정보 투명성 확보에 나섰다. 종근당·종근당바이오·경보제약 등 주요 계열사 데이터를 통합해 공시하며 초기 대응의 한계를 보완하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
문제는 ESG가 더 이상 이미지 관리나 선택적 경영 전략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이 조달·승인·유통·투자에 직결되는 구조로 전환되면서 ‘형식적 대응’만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의견도 이어진다.
환자 접근성, 약가 투명성, 임상 데이터 개방성과 같은 ‘사회적 가치’ 영역은 글로벌 투자자가 가장 민감하게 지켜보는 분야다. ESG가 글로벌 스탠다드로 고도화되는 가운데 정량 목표 없이 형식적 대응에 머무는 한국 제약사의 접근은 중장기 경쟁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전문가들은 ESG는 장기적으로 산업의 생존 조건이라고 설명한다. EU 공급망 실사법이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되고, 미국 SEC의 ESG 공시 기준도 가시화되는 가운데 한국 제약사들이 실질 지표 기반 전략을 갖추지 못할 경우 글로벌 조달 시장과 기관 투자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경고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 “이제는 제품의 효능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는지도 산업 경쟁력을 결정짓는 요소”라며 “형식적인 ESG 대응만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제약 ESG의 핵심은 제품 자체의 사회적 기여도와 위험 요인을 구조적으로 공개하고 관리하는 역량”이라며 “보고서 분량이나 평가 등급이 아닌 임상데이터 투명성이나 취약 계층 접근성 확대 같은 본질적 지표가 핵심 평가 기준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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