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자락 숲속에서 신기한 식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내에서 전례 없는 아열대·열대성 난초다. 아직 공식 국명도 없고, 이름조차 가칭이다. 방울처럼 둥근 열매 모양과 유령처럼 투명한 색에서 따온 '방울유령란'이라는 이름이 지금은 유일한 호칭이다.
투명하고 엽록소 없는 식물… 유령처럼 자란다
방울유령란은 이름처럼 유령 같은 식물이다. 엽록소가 전혀 없어 광합성을 할 수 없다. 대신 낙엽이나 썩은 나무 등에서 양분을 흡수하며 살아간다. 보통 이런 식물을 ‘부생식물’이라 부른다. 또 다른 특징은 생육 기간이 매우 짧다는 점이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낸 시점부터 고작 한 달을 채우기도 힘든 것으로 알려졌다. 흙 아래에 뿌리줄기를 품고 있다가 특정 조건에서만 꽃대를 올려 짧은 삶을 마친다.
전체적으로는 반투명하거나 하얀색을 띠며, 꽃도 색을 거의 가지지 않는다. 빛이 거의 없는 어두운 숲속에서 자라며, 햇볕을 받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사람 눈에 잘 띄지 않고, 수명이 짧아 발견도 어렵다. 흔히 관찰되는 유령란과 비슷하지만, 방울유령란은 뿌리줄기가 덩어리 모양이고, 꽃잎의 배열이 달라 구별할 수 있다.
일본과 중국 남부, 인도차이나반도, 대만 등에서 기록된 식물이지만, 제주에서 자생으로 발견된 건 처음이다.
기후변화로 식생대가 북상… 제주서 아열대 식물 잇따라 발견
방울유령란은 아열대·열대성 기후를 좋아하는 식물이다. 제주도에서 이 식물이 발견됐다는 사실은 기후 변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는 “기후변화로 인해 이 식물의 생육 조건이 한반도 남단에서도 충족됐기 때문에 방울유령란이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주는 이미 아열대성 식물의 북상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제주에서 발견된 아열대·열대성 식물만 해도 40종에 달한다. 이번 방울유령란 발견은 시민 과학자들의 생태 모니터링을 통해 확인된 사례로, 노인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뤄진 조사 중 처음 포착됐다. 이후 사계절에 걸쳐 관찰을 진행한 끝에, 지난 24일 언론에 공식적으로 공개됐다.
이번 발견은 한반도 남단의 기후가 열대성 식물의 서식지로 바뀌고 있다는 증거가 축적되고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식물 분포의 변화는 생태계 구조 자체를 뒤바꿀 수 있어, 장기적인 환경 변화 관측에도 활용될 수 있다.
이름도 없는 신종… 학술 등재 준비 중
방울유령란이라는 이름은 정식 국명이 아니다. 이 이름을 처음 붙인 임은영 연구사는 “열매가 방울처럼 생긴 데다, ‘방울’이라는 단어가 제주 숲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 붙였다”고 밝혔다. 정식 학술 보고는 분류학자들의 심사와 국명 제정을 거쳐야 한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자생지 조사와 유전학적 비교를 거쳐 조만간 학술지에 보고할 예정이다.
현재까지 제주 외 다른 지역에서는 방울유령란이 확인된 사례가 없다. 따라서 이번 사례는 국내 최초의 발견이자, 유일한 기록으로 남게 됐다.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 자란 열대성 식물이 제주도에서 확인됐다는 점은 앞으로 더 많은 미기록종이 우리 곁에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식물 연구자뿐 아니라 환경학계, 생태계 보전 분야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한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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