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촉발된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운동’에서 예상치 못한 주역이 등장했다. 케이팝 팬덤이었다. 미국 경찰이 #blacklivesmatter 해시태그를 시위대 추적에 활용하자 팬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연예인 영상에 #BLM을 무작위로 삽입해 감시 체계를 교란했다. BTS가 공식적으로 BLM운동을 지지하며 100만달러를 기부했고 팬덤은 하루 만에 같은 금액을 추가 기부했다.
이는 단순한 팬 활동을 넘어선 창의적 디지털 행동주의였다. 케이팝 팬덤은 차별과 무시에 대해 가장 조용한 연대로 가장 분명하게 목소리를 냈다. K-문화의 전 세계적 성공을 설명할 때 대다수는 재능, 기술, 세계화, 정부 정책 등을 꼽는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발전시켜온 민주주의가 성공의 배경이다.
민주주의가 강해야 문화가 풍요로워지고 그 문화 속에 민주주의는 더욱 탄탄해진다. K-문화가 증명해낸 세계사적 교훈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표현의 자유, 자발적 조직,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과 비판 의식이 일상화된 공간이 됐다. 이 민주주의의 공기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콘텐츠를 창작하는 문화에도 스며들었다. 시민은 더 이상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다. 함께 기획하고, 감상하고, 평가하는 문화의 실질적 주인이 됐다.
K-문화의 성공은 획일화를 극복한 다양성의 승리다. 이 배경에는 김대중 정부의 감각적 전략이 있었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 ‘문화산업을 제2의 성장엔진’으로 선언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정책이 자유를 키웠고, 그 자유는 콘텐츠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문화 다양성이 일상화될수록 민주주의의 다양성은 넓어진다.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할 수 있는 사회에서 다양한 문화 표현이 가능해지고 이는 다시 민주주의를 풍성하게 만든다. K-문화가 보여주는 창의성과 비판정신, 포용성은 우리 국민이 일궈낸 다원 민주주의의 결실이다.
K-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시하고, 고발하며, 대화를 유도한다.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은 자본주의가 만든 불평등한 계급 구조를, ‘더 글로리’는 차별과 냉소를, ‘택시 운전사’는 한국 현대사의 고통을 다룬다. BTS는 자기 존중과 다양한 연대의 가치를 노래한다. 최근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토니 어워드 6개 부문을 석권했고 ‘케이팝 데몬헌터스’는 넷플릭스 공개 4일 만에 41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드라마는 질문하고, 영화는 고발하며, 음악은 위로하고, 팬덤은 행동한다. K-문화는 시민이 써 내려가는 민주주의의 서사 그 자체다.
2024년 12월3일 불법 계엄 시도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한 사람의 어리석은 판단이 K-문화의 풍요로움을 파괴하려 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국민이 막아냈다. 촛불의 광장에서 민주주의와 K-문화는 융합하며 희망의 빛을 발산했다.
K-문화는 이제 단순한 문화 수출을 넘어 민주주의의 새로운 언어가 됐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K-문화를 통해 자유, 다양성, 연대의 가치를 경험하고 있다. 자국의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K-문화의 미래는 산업 전략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감수성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달려 있다. 문화가 강해야 민주주의가 강하고, 그 강함의 바탕은 다양성이다. 문화 다양성은 민주주의의 다양성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더 풍부한 문화를 낳는다. K-문화가 보여준 이 선순환이야말로 미래 민주주의의 핵심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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