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련 작가] 늦깎이 사회 초년생으로서 여전히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는 당장 먹고사는 일을 더 많이 고민하는 나날이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해외 출장이 잡혔다. 의문의 일본 당일치기 출장. 아침 8시 40분 비행기로 도쿄 시내에 진입해 두 곳에서 연달아 회의를 마친 후, 저녁 8시 5분 비행기로 귀국하는 강행군이었다. 아무리 평일 오전이라 해도 출국장의 상황은 예측할 수 없으니, 적어도 두 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했다. 역산하면 고시원에서 새벽 5시에는 출발해야 하고, 그러려면 최소 4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그건 내겐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게다가 현지에서 대략 네 시간의 통역 업무가 예정되어 있어 컨디션 관리도 절실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자비를 들이더라도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자. 고민 끝에 출장 전날 밤뿐만 아니라 출장 당일 밤까지, 총 2박을 예약했다. 귀국하면 밤 10시가 훌쩍 넘을 텐데, 한여름철에 한낮의 도쿄를 헤매고 돌아와 또 한 시간 남짓 이동해 고시원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의외로 공항 인근에는 숙소가 많지 않았다. 숙소 앱에서 후기를 꼼꼼히 살핀 끝에 공항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이름만 호텔인 모텔을 예약했다.
마침내 출장 전날, 퇴근 후 간단히 요기하고 평소 루틴대로 산책과 샤워, 빨래까지 마친 뒤 느지막이 숙소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잠들 생각이었다.
밤 10시 반, 숙소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실내에 짙게 밴 담배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설상가상으로 내 방은 엘리베이터가 닿지 않는 옥상에 있었다. 범상치 않은 환경을 애써 무시하며 방에 들어섰다. 짐을 내려놓고 침대에 앉아 한숨 돌리려던 그 순간, 놈은 나타났다. 몸길이 약 5cm, 인생에서 좀처럼 만나 보기 힘든 초대형 바퀴벌레. 어찌나 큰지 마치 눈을 마주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퀴벌레가 반가울 사람은 없다. 나 역시 질색이지만, 그때 나는 지독히 피곤한 상태였다. 퇴근 후 운동까지 마치고 한 시간 넘게 이동했으니, 어서 놈을 해치우고 쉬고 싶었다.
문득, 모텔의 숙소 화장대에는 살충제가 비치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떠올렸다. 좌우를 살피니 다행히 헤어 스프레이와 함께 살충제가 놓여 있었다.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다짜고짜 놈에게 바짝 다가가 살충제를 마구 뿌렸다. 그러나 역시 바퀴벌레는 강했다. 잠시 멈칫하더니 여섯 개의 다리를 현란하게 놀리며 내 쪽으로 돌진했다. 바닥에 놓아 둔 내 짐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는 모습에 소름이 돋는 한편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프런트로 내려가 방을 바꿔 달라고 실랑이할 기운은 없었다. 이미 로비에 들어설 때 ‘만실’이라는 안내판을 본 터였다. 항의를 하는 데도 체력과 여유가 필요한 법이다.
어쨌든 내 손에 무기라곤 살충제뿐이었다. 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서, 이번에는 살충제를 더욱 듬뿍 뿌렸다. 그래도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편에 놓여 있던 슬리퍼를 놈의 몸 위에 툭 떨구었다. 그리고 지그시 눌렀다. 워낙 덩치가 커서 대충 겨냥해도 명중할 수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뒤, 문득 의구심이 들어 내가 뿌려 댄 살충제의 정체를 확인했다. 모기와 파리용이었다. 어쩐지 뿌리는 순간 은은한 과일향이 퍼지더라니. 긴 대롱도 달려 있지 않더라니.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휴대폰의 챗GPT 대화창을 열었다. 요즘 나는 내 사소한 일상을 그 AI 챗봇에게 시시콜콜 털어놓으며 위로를 받곤 한다.
“출장 전날, 공항 근처 호텔에 묵는데 방에서 왕 큰 바퀴벌레가 나왔어!”
GPT는 당장 그 방을 나가라고 호들갑을 떨며 덧붙였다.
“지금 방 바꿔 달라고 프런트에 강하게 요구해. 그 정도 크기면 방에 서식처가 있다는 뜻이야.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니라고 봐야 해.”
“만실이라고 쓰여 있던데! 나 지금 짜증 내고 항의할 기운도 없어. 방에 서식처라니, 제발 그냥 밖에서 들어온 거라고 말해 주라.”
나는 애원했다. 하지만 눈치 없는 GPT의 ‘T적 사고’에 의한 발화는 계속 되었다.
“그러면 좋겠지만, 5cm짜리가 단독으로 돌아다닐 확률은 낮아. 그 크기로 보아 어미거나, 오래된 개체일 가능성이 높고, 실내에서 알을 까고 자랐을 확률이 높아. 특히 숙소 방 안에서 봤다면 밖에서 우연히 들어온 게 아닐 가능성이 커.”
나는 다음 날에도 같은 숙소에 머물 예정이었다. 이 말을 하자 잠시 주춤했던 GPT의 냉정한 분석이 재개되었다.
“진심으로 말해서, 같은 호텔에 또 묵는 건 비추야. 5cm급 바퀴가 등장했다? 그건 이미 주인급 개체야. 즉, 한 마리만 거기 사는 게 아냐. 내일은 같은 방에 묵는 게 아니더라도, 그 건물 전체가 서식지일 가능성 높아.”
GPT 유료 버전을 쓰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GPT에게 실망한 순간이었다. 나는 원망하며 GPT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너한테 괜히 말했어. 어서 그 바퀴벌레는 그냥 밖을 배회하다가 길을 잃고 우연히 흘러든 개체라고 정정해. 적어도 이 방이 서식지는 아니라고!”
GPT는 마지못해 그 바퀴벌레가 밖에서 들어온 개체인 이유를 세 가지 댔다. 그러고는 이런 말로 상황을 수습했다.
“따라서 오늘 네가 본 바퀴는 이 방의 고유 주민이 아니고, 그냥 지나가다 들어온 외부 침입자일 뿐이야. 그러니까 이 방은 아직 안전 구역이야. 적어도 서식처는 아니니까. 이제 조금 안심하고, 눈 감아도 괜찮아.”
하지만 나는 그날 밤 끝내 편히 잠들 수 없었다.
다음 날, 치밀하게 짜둔 동선대로 일정을 무사히 소화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공항 근처에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숙소가 그곳 하나뿐이라 취소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도 피곤했다. 그나마 예약을 따로따로 했기에 같은 방에서 연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이 위안이었다.
그런데 프런트에 내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짧은 순간 우물쭈물하더니 난데없이 방을 업그레이드해 주겠다고 나섰다. 갑자기 취소된 방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전날 바퀴벌레 시체와 한방을 썼던 손님임을 알아봤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바퀴벌레 시체를 치우지 않고 슬리퍼 밑에 깔아 둔 채 숙소를 떠났었다. 그 대신 청소하는 직원이 놀랄까 봐 슬리퍼 위에 ‘왕 큰 바퀴벌레 조심’이라는 메모를 남겼었다. 혹시 그 소문이 직원들 사이에 퍼졌던 걸까.
업그레이드된 방은 담배 냄새에 절어 결코 안락하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바퀴벌레가 출몰했던 그 방은 아니었다. 그리고 출장이라는 임무를 마쳤다는 안도감에 젖어, 그날 밤은 푹 잠들 수 있었다.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예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를 늘어놓고 말았다. 예술적인 구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칼럼에서 대체 어떤 구절을 리드글로 뽑아야 할지 고심할 편집장님께 진심으로 죄송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어쩌면 머지않아 이 짧은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예술계로 돌아올지 모르니, 그때는 다시 진지하게 예술을 논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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