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과 인식혁명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메이지 유신 사례를 보면, 창조적 소수자 등장(인식혁명을 통한 각성의 시작) → 주체세력 형성(창조적 소수자를 둘러싼 일련의 사람들) → 공론장(출판문화, 학교, 정책)을 통한 확산 → 임계질량 도달(변화의 가속화)의 패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메이지 유신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요시다 쇼인이 씨앗을 뿌렸고, 삿초동맹(薩長同盟,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동맹)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유신 사무라이’들이 근대적인 공적 사명감으로 무장하여 주체세력을 형성했고, 사카모토 료마와 후쿠자와 유키치가 특급 도우미 역할을 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바통을 이어받아 오쿠보 도시미치가 설계한 근대 국가의 틀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제외하고 유신의 주역들은 대부분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그만큼 격변의 시기였다. 근현대 일본 우익사상의 핵심이자 현대 일본의 정치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조슈벌長州閥의 사상적 아버지인 쇼인은 1859년 11월 30세에 처형당했다. 료마는 1867년 11월 막부순찰대의 습격을 받아 교토에서 33세에 암살됐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을 일으킨 후 실패하자 1877년 9월 자결했다. 오쿠보는 1878년 5월 14일 세이난 전쟁에 참여했던 여섯 명의 불평사족에게 암살됐다. 이토는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했다. 결국 후쿠자와를 제외하고 나머지 쇼인, 료마, 사이고, 오쿠보, 이토는 처형, 암살, 자결로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했다.
이 중 요시다 쇼인, 후쿠자와 유키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으로 우리와 악연이다. 하지만 후쿠자와와 이토는 일본 지폐의 주인공일 정도로 지금도 일본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특히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지식인들이 서양의 실상과 실체를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렸기 때문에 농민의 난과 사무라이 계급의 저항이 있었는데도 일본은 근대화를 향해 방향을 잡아갈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조선은 독자적으로 ‘조선만의 길’을 제시할 만한 사상가가 없었다. 지식계층인 사대부가 먼저 근대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 깨달음이 국민들에게 스며들어야 했다. 그런데 조선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일본은 ‘독서하는 사무라이’들이 40만~50만 명으로 추정된다.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등 후쿠자와 유키치 책들이 거의 40만~50만 부가 팔렸다. 하급무사 출신인 유키치가 인세만으로도 시사신문, 게이오대학교, 출판사 등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독서하는 사무라이 층이 탄탄했기에 출판 영역 등 일본의 공론장은 매우 탄탄했다. 사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합리적으로 숙고하는 독서 대중 없이 공론장이 형성되기는 힘들다.
[대전환기27]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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