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자라기 시작한 논바닥에 물이 찼다. 물결 위를 사뿐사뿐 걷는 듯한 새가 눈에 들어온다. 다리는 길고 가늘며 깃털은 화려하다. 꼬리엔 황금빛 장식 깃이 길게 늘어져 얼핏 공작을 닮았지만 크기는 까치보다 작다. 마치 동양화 속 장식처럼 보이는 이 새는 여름철 한국을 찾는 철새다. 이름은 ‘물꿩’으로 한자로는 수면 위의 꿩이라는 뜻을 가진 ‘수면계’(水雉)로 불린다.
논 한가운데 머무는 물꿩은 생김새만큼이나 독특한 삶을 살아간다. 특히 여름이면 그 생애의 정점을 찍는다. 짝짓기를 마친 수컷은 홀로 알을 품고 새끼를 키운다. 암컷은 알을 낳자마자 다른 수컷을 찾아 떠난다. 한 철에 모든 걸 쏟아붓고 수컷은 새끼가 자라기 전 죽기도 한다.
꼬리 길이는 몸통 2배, 한국 여름에만 볼 수 있는 새
물꿩은 두루미목 물꿩과에 속하는 철새다. 동남아·인도·중국 남부 등에서 겨울을 보내고 한국 남부지방, 특히 논습지와 간척지 주변에 여름 번식을 위해 날아온다. 제주도, 전남 해안, 경남 창녕, 충남 금강 유역 일부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몸길이는 30cm 남짓으로 크지 않다. 하지만 번식기 수컷은 꼬리가 60cm 이상 길게 자란다. 화살처럼 뻗은 꼬리깃은 몸집보다 2배나 길고, 부드럽게 휘어 끝이 뾰족하다. 날 때보다 걸을 때 더 눈에 띈다. 다리도 길고 가늘어 부레옥잠이나 수련 같은 수생식물 위를 걷기 적합하다. 몸무게가 가볍고 발가락이 넓게 퍼져 있어 물에 빠지지 않는다.
수컷은 번식기 중 얼굴이 진한 자주색과 흰색이 대비되는 무늬로 바뀌고 눈 주변이 붉게 변한다. 암컷은 깃이 짧고 색이 수수하다. 멀리서 보면 공작과 꿩의 중간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수컷이 알 품고 새끼 키우는 이유
물꿩의 번식 방식은 일반 조류와 다르다. 대부분의 새는 암컷이 알을 품고 수컷은 먹이를 물어다 주거나 경계를 맡는다. 반면 물꿩은 완전히 반대다. 암컷은 여러 수컷과 짝을 짓고, 알을 낳은 후엔 둥지를 떠난다. 남겨진 수컷이 홀로 알을 품고 부화까지 책임진다.
둥지는 얕은 물가의 수초 위에 만든다. 작은 수상가옥처럼 엮어 고정하고, 알이 빠지지 않게 잎으로 받친다. 평균 4개 정도의 알을 낳는데, 알 색은 회갈색 바탕에 짙은 반점이 있다.
수컷은 22~24일가량 알을 품는다. 이 시기엔 외부로 거의 움직이지 않고 먹이 활동도 줄인다. 천적이 가까이 오면 가슴에 알을 숨기고 풀 속으로 파고든다. 새끼가 부화하면 며칠 내로 수초 사이로 걸으며 사냥을 가르친다. 먹이는 주로 곤충, 작은 연체동물, 수생식물의 씨앗이다. 번식기 동안 수컷은 에너지를 거의 다 소진한다. 일부는 새끼를 키운 직후 죽거나 날지 못하고 남아 있다 사라진다.
물꿩이 여름에 필요한 이유
물꿩은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물 속 곤충과 해충을 조절하고, 논 생물 다양성을 높인다. 수생식물 사이를 오가며 수분 매개도 한다. 농약을 뿌리지 않은 논에서만 살아남는 민감한 종이다. 최근 벼 대신 공장형 스마트팜이나 비닐하우스가 늘어나면서 이들의 서식지가 줄고 있다.
환경부는 물꿩을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했다. 문화재청은 천연기념물 제203호로 보호하고 있다. 생태공원이나 논 습지 주변에서 전문가 인도 없이 무단 접근할 때 서식지가 교란돼 알이 부화하지 않거나 둥지가 파괴된다. 관찰은 망원경이나 드론 카메라 등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보호구역에서는 100m 이상 거리두기를 지켜야 하며, 사진 촬영 시 플래시는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둥지를 발견했을 경우 위치를 기록한 뒤 관할 시군 생태 관리 부서에 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컷의 짧은 여름, 암컷의 긴 철새 여정
암컷은 5월 말 6월 초 수컷을 만나고 6~7월 중 여러 번 짝짓기를 한다. 번식이 끝난 암컷은 다시 따뜻한 지역으로 떠난다. 일부는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까지 내려간다. 반면 수컷은 제자리를 지키며 알을 지키고, 8월까지 새끼를 돌본다. 기온이 떨어지는 9월경까지 살아남은 수컷과 새끼는 무리를 지어 이동한다.
번식기 중 암컷 한 마리가 3~5마리 수컷과 짝짓기한 사례도 보고된 바 있다. 반면 수컷은 단 한 둥지에만 집중한다. 수컷의 이런 헌신적 행동은 진화적 전략으로 해석된다. 강한 암컷 유전자를 가진 새끼가 많이 태어날 수 있고, 암컷은 짧은 시간에 번식을 마치고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
물꿩은 외래종과는 달리 환경에 민감하고 자연 서식지가 필수다. 길들이거나 사육도 어렵다. 체온 유지가 어렵고, 수초 위에서만 알을 품는 특성 때문에 일반적인 환경에선 생존이 어렵다. 기르려다 죽이는 사례는 생태계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
Copyright ⓒ 위키푸디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