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 품목에 대한 관세 부과를 예고하면서 한국의 주력 수출 산업인 반도체와 자동차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현지시간으로 27일, 반도체에 대한 관세 조치를 2주 내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한 조치로 미국이 국가 안보를 이유로 특정 수입 품목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강력한 무역 수단이다.
러트닉 장관은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EU 집행위원장 간의 무역협상 타결 발표 자리에서 이같이 밝혔으며 "우리는 반도체 생산을 미국으로 다시 가져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발언은 관세 조치가 단순한 무역 규제가 아닌 미국 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 재구축을 위한 전략적 포석임을 드러낸다.
미 상무부는 지난 4월부터 반도체뿐 아니라 웨이퍼, 반도체 기판, 범용·최첨단 반도체,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반도체 제조장비 및 부품 등까지 조사 대상으로 삼아왔다. 업계에 따르면 이들 품목이 모두 관세 대상에 포함될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생산기업은 물론 반도체를 부품으로 사용하는 전자 완제품 업체까지 광범위한 영향권에 들게 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의 대미 반도체 수출액은 약 106억 달러로 전체 반도체 수출의 7.5%에 해당한다. 이는 중국(32.8%), 홍콩(18.4%), 대만(15.2%) 등 주요 아시아 시장보다는 낮지만 미국이 글로벌 반도체 수요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를 감안할 때 그 파급력은 단순한 수치 이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관세가 부과될 경우 완제품에 포함된 반도체 수출까지 간접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 전자, 통신, 자동차 등 연관 산업 전반으로 부담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이미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4월 수입산 자동차에 25% 관세를 부과한 데 이어 5월부터는 자동차 부품까지 관세 범위를 확대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현대차와 기아는 올해 2분기 합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19.6% 감소하며 관세 충격을 실적으로 체감한 바 있다.
반도체 업계 역시 비슷한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며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반도체 패키징 생산기지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양사는 아직 메모리 생산시설을 미국 내에 보유하고 있지 않아 추가 투자 압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업계에선 생산시설 구축에 수조~수십조 원이 소요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미국의 관세 조치가 단순한 보호무역을 넘어 전략적 산업 재편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인공지능(AI), 클라우드, 반도체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과의 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핵심 기술의 내재화와 공급망의 자국 중심화를 강화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최근 보고서에서 "워싱턴의 초당적 목표는 미국의 반도체 제조 역량을 강화하고 중국이 잠재적으로 군사적 용도로 활용 가능한 첨단 반도체 기술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이러한 노력에는 한국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며 양국이 힘을 모은다면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를 완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미국이 현실적으로 모든 반도체 품목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대만 TSMC 등이 과점하고 있는 구조다. 미국 내 생산 능력은 극히 제한적이며 자국 기업들도 대부분 한국과 대만산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주요 미국 기술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 확장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집행 중인 가운데 반도체 가격 급등은 이들의 투자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다. 미국 기업들이 반도체 관세로 인한 원가 상승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전면적인 고율 관세보다는 선택적·단계적 조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이다.
현재 한미 간에는 무역협상이 물밑 진행 중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조치가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한 '카드'일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정부는 관세 부과가 현실화될 경우 미국 내 생산시설 투자 확대와 함께 전략적 협력을 병행하는 '투트랙' 대응에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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