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미국과 일본 간의 5,500억 달러(약 757조원) 규모 투자 약속이 양국 경제 관계의 새로운 시험대로 떠오르고 있다. 겉으로는 일본의 대미 우호와 전략적 협력을 상징하는 조치처럼 보이지만 실제 구조를 들여다보면 미국이 투자처를 지정하고 수익 대부분을 가져가는 사실상 '백지수표'에 가깝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23일(현지시간)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일본은 미국에 투자 대상 프로젝트를 정할 능력을 줄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서 항생제를 만들자'고 말하면 일본이 자금을 대고 우리는 해당 사업을 수행할 기업에 그 프로젝트를 넘길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 사업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90%는 미국 납세자가, 10%는 일본이 갖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 측이 자금 운용 주도권과 수익 배분까지 명확히 설정한 셈이다. 일본 정부는 투자 주체이지만 사업 운영이나 경영권에는 관여하지 않으며 실질적으로는 미국 경제 및 안보 강화를 위한 재정적 파트너 역할에 머무는 셈이다.
러트닉 장관은 "기본적으로 일본은 미국과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 안보 정책에 편승하며 관세 감면을 얻어냈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이 같은 투자 아이디어를 지난 1월 일본 측에 직접 제안했다며 "일본은 결코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완전 개방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새로운 방식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처음 러트닉 장관이 제시한 투자 규모는 4,000억 달러였지만 이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 과정을 거치며 5,500억 달러로 증액된 것으로 보인다. 해당 자금은 자본금 외에도 대출과 대출보증 형태로 구성됐다고 그는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특히 자동차 관세 인하와 관련해서도 일본에 대해 제한적 유화 조치를 취한 것으로 분석된다. 원래 25%였던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가 15%로 낮춰졌지만, 러트닉 장관은 "일본 자동차 제조사가 여전히 일부 차량을 일본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설정된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일종의 '수출 경계선'을 설정한 셈이다.
한편 GM 등 미국 자동차 제조사가 한국 등 다른 국가에서 생산한 차량을 역수입할 경우 25%의 고율 관세를 그대로 적용받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건 한국의 것이니까"라며 "유럽, 한국의 대응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이는 미국이 다자간 무역 협상에서도 점점 더 미국 중심의 '선택적 개방'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이와 함께 일본은 미국산 자동차를 수입할 때 안전 기준과 환경 규제 등에서 미국의 기준을 수용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규제 동조화 수준에서 미국 기업에 유리한 시장 환경을 조성하려는 조치로 평가된다.
국제 무역 전문가들은 이번 합의가 단순한 투자 확대 이상이라고 본다. 워싱턴 소재 한 싱크탱크의 아시아 담당 연구원은 "일본은 직접적 시장 개방 대신 '간접적 환심'을 사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라며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가 복귀하면서 미·일 관계도 실질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구조는 일본 내에서도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한 일본 경제 전문지는 "미국이 투자처를 정하고 일본이 자금만 대는 방식은 주권의 일부를 넘기는 것과 다름없다"며 우려를 표했다. 실제로 일본 내에서도 이 투자 약속이 정치적 '구속'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핵심 경제 참모진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외국 투자를 유치하는 한편, 미국 납세자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경제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보호무역주의를 넘어선 '국가 주도형 자본 운영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미·일 간 투자 합의는 단순한 자금 거래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의 주도권과 기술 주권, 그리고 지정학적 우위를 둘러싼 외교·경제전의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일본은 미국의 무역 압박을 정면 돌파하기보다는 5,500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와 제한적인 시장 접근 혜택을 맞바꾸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그러나 그 대가가 과연 정당한 선택이었는지를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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