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1925년 7월, 기록적인 폭우가 한강 유역을 덮쳤다. ‘을축년 대홍수’로 불리는 이 재해는 서울 도심과 수도권 전역에 큰 피해를 남겼지만, 동시에 수천 년 전 역사의 단서를 세상에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 일대에서 강물에 깎여 무너진 절벽 속, 거대한 토성의 단면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유적이 바로 ‘풍납토성(風納土城)’. 이후 한 세기가 흘렀지만, 풍납토성은 아직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백제의 첫 왕도이자 고대 도시문명의 흔적이다.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는 대홍수 100주년을 맞아 17일 학술대회를 열고 풍납토성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
풍납토성은 백제가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한 ‘한성기(漢城期)’의 중심지로 평가된다.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이 토성은 기원전 1세기경 축조돼 475년 백제가 웅진(공주)으로 천도할 때까지 약 500년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전체 둘레는 약 3.5km, 면적은 120만㎡(약 36만 평)에 달한다. 이는 웅진성과 사비성은 물론,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도시 유적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규모다. 성벽은 흙과 나무, 자갈 등을 켜켜이 다져 쌓은 '판축(板築)' 기법으로 축조되었으며, 이러한 방식은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고급 토목기술로 통한다.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다채로운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초대형 건물지와 도로 흔적, 집수시설, 토기 가마 등은 이곳이 단순한 방어용 토성이 아닌, 정치·행정·종교 기능을 갖춘 종합적인 도성임을 보여준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조사에서는 지붕기와에 ‘대부(大夫)’라는 관직명이 새겨진 명문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는 백제 중앙 귀족층의 존재와 정교한 관료 체계의 증거로 해석된다. 또한 유리구슬, 철기류, 중국 한나라계 동전 등 국제 교류의 흔적도 발견되며, 한강 유역이 이미 기원전부터 동북아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풍납토성은 전체의 절반뿐이다. 나머지 절반 이상은 풍납동과 천호동의 민가, 상가, 학교 등 도시 개발 속에 묻혀 있다. 1997년 아파트 건설 계획으로 긴급 발굴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적 보존은 사실상 손을 놓은 상태였다.
현재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은 사적 보호구역 내 토지 매입을 추진하고 있으나, 토지 보상 문제와 주민 이주 협의, 정비계획 수립 등이 복잡하게 얽혀 진행 속도는 더디다. 2024년 기준 전체 사적 지정면적 중 42%만이 국가 소유로 확보되었으며, 나머지 민간 부지는 유적 보존과 일상 생활이 충돌하는 대표적인 문화재 갈등 사례로 꼽힌다.
풍납토성의 가치와 보존 문제는 단순히 과거의 유산 보전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도시 속 역사문화유산 보존의 대표적 사례로, 학계와 행정기관 모두의 도전과 과제로 자리잡고 있다.
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을 ‘동아시아 고대 도시 연구의 키(key)’로 보고 있다.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 관계자는 “성벽 구조, 도로 배치, 대형 건물 배치 등은 철저하게 계획된 도시 운영 체계를 보여준다”며 “고대 백제의 도시공간이 단순한 방어 거점이 아닌 정치·종교·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설명했다.
풍납토성은 단순한 유적을 넘어, 도시 한가운데 존재하는 고대 왕성이라는 점에서 전례 없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다음 100년’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라며, 도시 개발과 유적 보존의 균형을 위한 전방위적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문화재 전문가는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실체를 밝히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라며 “100년 전 자연이 드러낸 역사를 이제는 우리가 책임 있게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힌편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가 17일 개최한 학술대회 ‘물의 기억, 한성의 역사’에서는 백제 도성의 발굴 역사와 유적의 현대적 의미를 조명했다. 국립서울문화유산연구소는 풍납토성에 대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시민 대상 해설 프로그램 강화, 장기적인 유적공원 조성 계획 등을 추진 중이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