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량규제의 역설] ⑨금융 설계의 기준, 숫자 아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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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량규제의 역설] ⑨금융 설계의 기준, 숫자 아닌 사람

직썰 2025-07-16 00:00:00 신고

3줄요약
채권은 금융의 언어이고, 금리는 그 문법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에 익숙한 개인에게 채권은 여전히 낯선 자산이다. 그러나 경제 흐름과 자산시장의 방향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채권부터 이해해야 한다. 채권은 단순히 이자를 받는 수단이 아니다. 경제의 맥박을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는 직관적인 도구다. 이 시리즈는 채권의 기초부터 실전 전략까지, 시장을 해석하는 감각을 키우는 길잡이다. [편집자주]
[그래픽=안중열 기자·챗gpt]
[그래픽=안중열 기자·챗gpt]

[직썰 / 안중열 기자] 총량규제는 가계부채의 총량을 줄이기 위한 거시적 조치였지만, 그 안에서 배제된 개인들의 사정은 통계에 담기지 않았다. 대출 심사는 여전히 ‘얼마나 버느냐’에 치우쳐 있고, ‘왜 필요한가’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규제는 숫자를 통제했지만, 누구를 밀어냈는지는 충분히 해석되지 않았다. 실수요자를 위한 금융이 가능하려면 더 작고 정밀한, 목적지향적 구조 설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총량규제의 그림자, 실수요자의 이탈

2021년부터 시행된 총량규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금융당국은 은행별 대출 증가율에 상한선을 두고,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도입하며 심사 기준을 고도화했다. 이 같은 조치로 가계부채 증가율은 다소 둔화됐고, 국제 신용평가사들의 부정적 평가도 일정 부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실수요자들이 조용히 시장에서 이탈했다. 연체 이력이나 비정형 소득, 저신용 등급 등으로 인해 다수의 차주가 제도권 금융에서 배제됐고, 이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연 14% 이상의 고금리 카드론이나 현금서비스뿐이었다. 제도는 작동했지만, 이탈자의 복귀 경로는 설계되지 않았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2024년 신규 대출 탈락자 중 41.8%가 저소득·비정형 근로자이거나 신용 이력이 불충분한 집단이었다. 총량은 줄었지만, 그 과정에서 누가 밀려났는지는 정책 평가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회복 중심 ‘계층별 보증’, 금융 구조 다시 짠다

현재의 정책금융은 소득이나 신용점수 등 단일한 기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 방식은 다양한 사정과 회복 가능성을 가진 실수요자를 제대로 가려내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 틀을 벗어나기 위한 대안으로, 보증 제도를 계층별로 정교화하자는 움직임이 제기되고 있다. 단순히 리스크를 분산하는 장치가 아니라, 회복 가능성을 기준으로 선별된 실수요자에게 차등화된 보증을 설계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과거 연체 이력이 있지만 최근 6개월 이상 통신요금과 임대료를 성실히 납부한 차주라면, 공공이 70%, 민간이 30%를 보증하는 구조로 설계할 수 있다. 반대로 납부 이력이 불규칙하거나 연체가 반복된 이들에게는 보증 비율을 낮추거나 조건부로 설정하는 식이다.

이러한 구조는 공공의 보증 신뢰도를 기반으로 민간 자금의 유입 경로를 함께 설계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일정 수준 이상의 회복 가능성이 입증된 차주에게는 민간 금융기관이 자발적으로 금리 우대 상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유도하거나, 보증기금에 대한 후순위 손실보전 장치를 마련해 민간의 위험 부담을 줄이는 방식이다. 핵심은 단순히 보증률을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기반으로 신뢰 가능한 보증 계층을 설계하고, 그 구조 속에서 자금의 선순환을 유도하는 데 있다. 금융을 다시 짜는 출발점은 ‘보증의 정밀화’다.

◇목적 기반 ‘모듈형 DSR’의 등장

기존 DSR은 연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 비율을 40%로 고정 적용하는 일률적 모델이다. 이러한 구조는 대출의 목적이나 차주의 소득 구조, 상환 이력의 차이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수요자 중심 설계와는 거리가 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 ‘모듈형 DSR’이다.

모듈형 DSR은 차주의 대출 목적과 소득 유형, 생활 이력 등에 따라 상환 비율의 상한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구조다. 예를 들어 주거 목적의 대출을 신청한 청년층에 대해서는 통신요금 납부 내역, 고용보험 가입 이력, 임대료 지급 이력 등 생활 기반 데이터를 평가에 반영해, DSR을 최대 50%까지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 반면 소비성 목적 대출에는 기존보다 더 엄격한 기준이 설정될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이 금융 현장에 안착하려면 심사 체계 전반의 구조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금융사의 심사 엔진은 정형화된 소득 정보 중심의 로직에서 벗어나야 하며, 차주의 목적과 이력을 분류해 반영할 수 있는 모듈 기반 심사 체계를 내장해야 한다. 또한 각 모듈별 DSR 적용 기준은 금융소비자에게도 투명하게 공개돼야 하고, 내부 리스크 평가 모델은 규제 수치가 아니라 목적 적합성을 중심으로 리밸런싱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라, 금융사의 신용 평가 방식과 알고리즘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구조적 전환에 가깝다. 금융당국도 관련 제도화를 검토 중이며, 신용정보원과 마이데이터 플랫폼 등과의 연계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신용 등급 아닌 ‘회복 점수’로 평가한다

과거 신용정보만으로 회복 가능성을 판단하는 방식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얼마나 망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회복 가능한가’를 중심에 둔 심사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금융당국은 회복 가능성 점수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심사 플랫폼 개발에 착수했다.

이 플랫폼은 납세 이력, 공공수급 정보, 고용 형태, 통신비 및 임대료 납부 데이터 등 다양한 비정형 정보를 통합 분석해 ‘회복 가능성 점수’를 산출한다. 이 점수는 단순한 신용등급 보완을 넘어, 보증 상품 연계, 정책금융 추천, 민간 금융 자동 매칭까지 연결되는 종합 평가의 출발점이 된다.

차주가 플랫폼에 접속해 정보 제공에 동의하면 시스템은 항목별 가중치를 반영해 회복 점수를 산출하고, 일정 기준을 넘으면 자동으로 공공 보증이나 정책금융 상품으로 전환된다. 이 점수는 민간 금융사에도 전달돼, 일정 신뢰 수준 이상일 경우 내부 심사자료로 수용될 수 있도록 설계된다.

이를 위해서는 플랫폼의 알고리즘 신뢰성과 데이터 진본성 검증이 필수이며, 공공과 민간 간 연동 체계가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점수를 민간 금융사가 수용 가능한 ‘신뢰 등급’으로 인정하게끔 제도적 신호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는 마이데이터 기반 공공 인증체계와 API 연계 시스템을 통해 이 구조를 실현하겠다는 입장이다.

◇규제의 미래는 ‘설계’에 달려 있다

총량규제는 거시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조치였다. 그러나 숫자만을 줄이는 방식으로는 절실한 사람에게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의 본래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 이제 금융은 더 작고, 더 정밀하며, 대출 목적에 맞게 설계된 구조로 재편돼야 한다.

DSR은 상황과 목적에 따라 유연하게 조정돼야 하며, 회복 가능성에 따라 보증 구조를 계층화하고, 비정형 데이터를 활용한 디지털 심사 시스템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러한 설계는 단지 실수요자의 금융 복귀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금융의 본질적 역할인 ‘자금의 사회적 배분’을 복원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규제는 차단이 아니라 설계다. 그리고 그 설계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둘 때 비로소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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