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그랑프리 모터사이클 레이싱 시즌이 시작된 이후, 프리미어 클래스(전 500cc/현 모토GP)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간 라이더는 단
30명
에 불과하다.
1950년 FIA 포뮬러 원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쉽이 시작된 이후, 포뮬러 원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간 드라이버는 단
34명
에 불과하다.
그런데, 각각 30명과 34명에 불과한 양쪽 모두에 포함되는 교집합이 존재한다면 믿겠는가? 그러한 인물은 역사상 단 한 명이 존재한다.
그는 바로
1956, 1958, 1959, 1960시즌 500cc 월드 챔피언이자 1964시즌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인 ‘
존 서티스
’다.
“우리는 모두 조금은 미쳤지만, 서티스는 완전히 미쳤다.” - 그 당시 포뮬러 원 드라이버들이 남긴 말이다.
어쩌다 그는 2륜과 4륜 모두 정상에 오른 남자가 되었을까?
1934년 2월 11일 영국 서리 테츠필드, 존 서티스가 태어나던 해였다.
(잭 서티스, 존 서티스의 아버지)
사실 존의 집안은 완전한 레이싱 집안으로, “그의 혈관에는 기름이 흐른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 잭 서티스는 런던에서 바이크 매장을 운영한 영업사원이자 3회 사이드카 챔피언이었고, 그의 어머니 역시 바이크 라이더였다.
그 영향을 받아 존은 11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미캐닉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14살이 되던 해에는 아예 아버지의 사이드카에 올라 트렌트 파크에서 열린 레이스에서 우승하였다. 비록 그가 미성년자인 것이 발각되어 실격되었으나, 이것이 그의 첫 번째 레이스였다.
(1951년, 17살 시절 존 서티스)
이후 존은 아버지와의 경험을 토대로 본격적으로 모터사이클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15살에 그래스트랙 레이스 참여를 통해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였으며, 16살에는 아예 학교를 중퇴하고 빈센트 모터사이클 회사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며 바이크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17살이던 시절 스렉스턴 서킷에서 열린 ACU 레이스에서 같은 해 그랑프리 모터사이클 레이싱 챔피언이었던 제프 듀크와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스타덤에 올랐고, 같은 해인 1951년 브랜드 해치 서킷에서 열린 레이스에서 첫 우승을 가져가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듀크의 팀이었던 ‘노튼’은 그를 눈 여겨봤고, 마침내 그는 1952년 프로 경기인 그랑프리 모터사이클 레이싱에 노튼 소속으로 데뷔하게 된다. 3년 뒤 1955년, 그는 노튼의 팩토리 소속으로 합류하여 출전을 이어가나 하지만 노튼 회사가 재정난에 빠져버리며 향후 레이스 계획이 불투명해지게 된다.
(1956년, 맨섬 TT 주니어에서의 존 서티스)
이때, 존의 재능을 알아봤던 이탈리아의 거대 브랜드 ‘MV 아구스타’ 팩토리 팀에서 그의 영입을 제안했고, 그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합류하게 된다. 그는 MV 아구스타와 함께한 첫 해인 1956시즌 500cc에서 자신의 첫 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였으며, 이후 1958, 1959, 1960시즌 전부 500cc/350cc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가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 결과 단 26살의 나이에 그는 7개의 챔피언 타이틀과 4개의 프리미어 클래스 타이틀을 확보한 성공적인 드라이버가 되었으며, 특히 1959년에는 500cc/350cc의 모든 챔피언쉽 레이스를 우승하는 기염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맨섬 TT에도 출전하여, 시니어/주니어 클래스 합산 총 6번의 우승을 가져가는데에 성공하였다. 그는 ‘Big John’, ‘Son of the Wind’라 불리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1960년 말, 그는 MV 아구스타와의 계약을 종료해버린다. 바로, 4륜으로 전환하기로 선언한 것이다.
존이 4륜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농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58년 런던, <올해의 스포츠맨> 행사에서 그는 같은 해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이었던 마이크 호손과 함께 앉았다. 호손은 그에게 “이봐, 존! 언젠가 차를 한 번 몰아봐. 바이크보다 차가 더 세우기 쉽잖아.”라며 농담을 건네었다.
그가 한창 바이크에서 활약하던 1959년, 그는 4륜을 테스트할 것을 제안받는다. 첫 번째는 애스턴 마틴의 레그 파넬이 자사의 F1 레이스카인 DBR4를 테스트할 것을 제안했고, 굿우드 서킷에서 진행된 테스트 결과 당시 현역 드라이버와 비슷한 랩타임을 기록한다. 또한, 그는 리어 엔진 반월 그랑프리 레이스카도 테스트하기도 하였다.
(굿우드 서킷에서의 존 서티스)
여전히 존이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그랑프리 모터사이클 레이싱 시즌을 출전하던 1960년, 그는 마침내 자신의 첫 4륜 레이스를 출전하게 된다. 굿우드 서킷에서 열린 포뮬러 주니어 클래스 레이스로, 그는 켄 티렐의 레이스카를 빌려 출전하였다. 그의 첫 레이스 결과, 당시 주목받던 드라이버이자 향후 포뮬러 원 레전드 중 한 명이 되는 짐 클락 바로 뒤인 2위로 레이스를 마친다.
이 레이스에서 그의 재능을 보고, 한 남자가 그를 스카우트한다. 그 남자는 바로 로터스의 ‘콜린 채프먼’. 존은 1960년에 여전히 바이크로 활약 중이었지만, 채프먼의 제의를 받고 자신의 소속팀인 MV 아구스타와 협의한 끝에 500cc/350cc 그랑프리 일정이 간섭받지 않는 한에서 포뮬러 원 챔피언쉽 그랑프리에 ‘로터스’ 소속으로 출전하기로 결정한다.
(1960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의 존 서티스)
1960 모나코 그랑프리, 존의 첫 번째 포뮬러 원 챔피언쉽 그랑프리였다. 하지만 이 그랑프리에서는 퀄리파잉에서 P15를 기록한 후 차량 문제로 리타이어한다. 하지만 그의 두 번째 그랑프리인 1960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P2로 커리어 첫 번째 F1 포디움 피니쉬를 기록하고, 세 번째 그랑프리인 1960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는 커리어 첫 번째 폴 포지션을 기록하는 위엄을 보여줬다. 또한 여전히 바이크에서도 활약하며, 1960시즌 500cc/350cc 챔피언쉽에서도 1위를 기록해 자신의 6/7번째 챔피언 타이틀을 확보하는데에 성공한다.
이후 앞에서 말했듯이 1960년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바이크에서는 손을 때기로 결정하고, 완전히 4륜으로 전환하기로 선언한다. 이후 1961시즌에서는 F1 월드 챔피언쉽에 쿠퍼의 레이스카로 참여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1962시즌에는 롤라의 레이스카로 참여하여 2번의 포디움과 함께 챔피언쉽 4위로 시즌을 마친다.
한편 한창 그가 F1에 출전하던 와중, 한 남자가 계속해서 그에게 제안을 보내고 있었다.
(존 서티스와 엔초 페라리)
그 남자는 바로 ‘엔초 페라리’였다. 엔초는 다른 나라보다 영국인 드라이버가 더 준비가 잘 되어있으며, 더 큰 위험도 감수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영국인 드라이버를 선호했다. 그렇기에 영국인에다가 이탈리아 회사인 MV 아구스타에서의 경력으로 이탈리아어 또한 구사할 줄 알았던 존에 관심을 가졌고, 지속적으로 존에게 제안을 보냈다. 존은 처음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거절하였지만 마침내 1963년, 페라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쿠데리아 페라리’와 계약한다.
1963시즌은 페라리가 1961시즌 더블 타이틀을 차지한 이후 엔지니어들이 대거 이탈하고 팀을 정비하던 시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명 높은 녹색 지옥이라 불리는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에서 열린 1963 독일 그랑프리에서 첫 번째 우승을 가져오는데 성공한다.
(페라리의 1964시즌 F1 레이스카, 158 F1)
마침내 1964년, 페라리는 새로운 직분사 시스템이 적용된 V8 엔진으로 210마력 이상의 출력을 내는 새로운 레이스카인 158 F1을 공개한다. 새로운 레이스카를 토대로, 존은 논챔피언쉽 그랑프리인 시라큐스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좋은 출발을 한다. 하지만 정작 챔피언쉽에 들어서는 처음 4경기 중 3경기에서 리타이어하며 순조롭지 못 한 출발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5라운드 영국 그랑프리 포디움을 시작으로 6라운드 1960 독일 그랑프리와 페라리의 홈인 몬자에서 열린 8라운드 1960 이탈리아 그랑프리까지 우승하며 챔피언 경쟁에 뛰어든다. 그리고 9라운드 미국 그랑프리에서 P2를 기록하여 챔피언쉽 2위로 최종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4 멕시코 그랑프리 레이스 스타트)
마침내 9라운드가 지나고 최종전인 10라운드 멕시코 그랑프리를 위해 에르마노스 로드리게스로 이동하게 된다. 최종전을 앞두고 드라이버 챔피언쉽 Top 3는 다음과 같았다.
1. 그레이엄 힐 (BRM) : 39포인트
2. 존 서티스 (페라리) : 34포인트
3. 짐 클락 (로터스) : 30포인트
또한 당시 포인트 체계는 P1-P6까지 9-6-4-3-2-1포인트 순이었다. 또한 1964시즌부터 드랍스코어룰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총 10라운드 중 상위 6경기만의 포인트를 반영하는 룰이었다.
다시 챔피언쉽 경쟁으로 돌아와 살펴보자면 그레이엄이 상당히 유리한 고지에 위치해있었다. 챔피언쉽 경쟁자인 존과 짐의 성적과 관계없이, 그레이엄이 이번 그랑프리에서 P1/2로 피니쉬하거나 존이 우승하지 않고 그레이엄이 P3로 피니쉬한다면 무조건 챔피언 타이틀은 그레이엄의 것이었다.
마침내 1964년 10월 25일, 짐은 폴 포지션에서, 존은 4그리드에서, 그레이엄은 6그리드에서 멕시코 그랑프리 레이스를 시작한다. 레이스 스타트 후, 짐은 폴 포지션을 유지하여 레이스 리더로 달리고 있었고 그레이엄은 3위로 끌어올리며 그레이엄의 챔피언 타이틀 획득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편 존은 5위로 떨어져서 챔피언 경쟁에서는 멀어진 듯 보였다.
그런데 레이스 중반, 치열한 배틀 끝에 로렌조 반디니가 그레이엄의 레이스카 뒤를 들이받아 그레이엄의 배기 장치가 손상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레이엄은 출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순위가 한참 밀려나 챔피언 타이틀 경쟁에서 멀어지게 된다. 한편 짐은 여전히 레이스 리더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대로면 챔피언 타이틀은 짐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한 랩만을 남겨둔 상황, 갑자기 레이스 리더 짐의 레이스카가 멈춘다. 바로 짐의 연료 장치에 문제가 생겨 엔진이 멈춰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짐은 챔피언 타이틀 경쟁에서 완전히 아웃되고 단 한 랩만을 남겨둔 상황에 1위는 댄 거니, 2위는 로렌조, 3위는 존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나면 위의 포인트 체계에서 알 수 있듯이 존은 48포인트에 그쳐 챔피언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2위 로렌조는 페라리 소속으로 존의 팀메이트였고, 페라리는 그 즉시 현 상황을 파악하고 파이널 랩을 시작하러 오는 로렌조에게 피트 보드로 존과 포지션 스왑을 할 것을 지시한다.
로렌조는 이 팀 오더를 받아들여 속도를 줄였고, 짐에게 2위 자리를 내주었다. 그렇게 짐은 파이널 랩에 순위를 얻고 레이스를 P2로 마치게 된다. 레이스 결과, 1964시즌의 최종 드라이버 챔피언쉽 Top 3는 다음과 같았다.
1. 존 서티스 (페라리) : 40포인트
2. 그레이엄 힐 (BRM) : 39포인트
3. 짐 클락 (로터스) : 32포인트
(NART 리버리의 158 F1을 탄 1964 멕시코 그랑프리의 존 서티스)
그렇게 존은 1964시즌 포뮬러 원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같은 해 페라리도 함께 컨스트럭터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앞서 적용된 드랍스코어 룰과 여러 운, 그리고 파이널 랩에서의 팀 오더로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가긴 했지만 어쨌든 그는 최초로 그랑프리 모터사이클 챔피언 타이틀과 F1 챔피언 타이틀을 둘 다 가진 최초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여담으로 존은 NART의 파란색 리버리를 마킹한 페라리를 타고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였는데, 그로 인해 빨간색이 아닌 페라리를 타고 챔피언을 가져간 유일한 드라이버라는 진귀한 기록도 세우게 되었다.
또한 그는 내구 레이스에서도 활약하였는데, 페라리 소속으로 1963년부터 르망 24시에도 출전해온 것이다. 그가 F1 타이틀을 가져간 1964 르망 24시에서는 반디니와 함께 P3로 피니쉬하여 포디움에 오른 것에도 성공하였다. 그렇게 그의 성공적인 한 해가 지나고 1965년에 들어섰다.
(1965년 사고 이후의 존 서티스)
존은 치명적인 사고를 겪게 된다. 1965시즌 F1에서는 페라리의 경쟁력이 약화되었고, 그래서 캔암 시리즈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1965년 9월 25일 캐나다 모스포트 파크 서킷에서 열린 캔암 시리즈 레이스에서 롤라 T70 타던 도중 서스펜션으로 강한 충돌을 겪은 것이다. 그는 겨울 내내 재활 과정을 겪어야 했고, 이후 1966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성공적으로 페라리와 함께 우승을 가져간다.
그런데, 그 레이스는 그가 페라리와 함께 한 마지막 레이스였다. 페라리의 팀 매니저 유제니오 드라고니는 이탈리아인을 편애하고, 피아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그가 엔초와 긴밀하게 지내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 유제니오는 지속적으로 갈라져있었다.
마침내 1966 르망 24시, 그는 유제니오에게 라이벌인 포드를 앞서긴 위해서는 첫 스틴트에서 빠르게 달려야 하기에 본인이 출전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유제니오는 피아트의 회장인 지아니 아델리가 관중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사촌인 루도비코 스카르피오티를 첫 스틴트에 투입하는 결정을 내린다.
결국 1966 르망 24시에서는 포드가 1, 2, 3, 4위를 전부 차지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그는 페라리와 인연을 끊고 영국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은퇴하는 줄 알았지만, 그는 ‘쿠퍼’-마세라티 F1 팀의 제안을 받아 1966시즌 남은 F1 챔피언쉽 그랑프리를 쿠퍼 소속으로 출전하게 된다.
(1967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랑프리에서 혼다 RA273를 운전하는 존 서티스)
쿠퍼에 합류한 뒤 1966시즌 F1 최종전인 1966 멕시코 그랑프리에서 존은 쿠퍼와 함께한 첫 우승을 거두고, 다음 해에는 ‘혼다’ F1 팀에 합류하여 페라리의 홈인 1967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혼다와 함께 한 첫 우승을 거둔다.
하지만 그 경기가 그의 마지막 F1 그랑프리 우승이었다. 혼다에서 팀 운영에서도 참여했던 그는 점점 트랙에서의 퍼포먼스가 약화되었고, 1969시즌에는 ‘BRM’에 합류하였으나 팀 수뇌부와 갈등을 겪은 탓에 한 시즌 만에 팀을 나간다.
이후에 그는 자신의 레이싱 팀을 만들어 F1, F2, 포뮬러 5000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1972년을 끝으로 레이싱에서 은퇴한다. 그래도 1972년 그처럼 2륜에서 4륜으로 전환한 9회 그랑프리 모터사이클 레이싱 챔피언 마이크 헤일우드가 팀 서티스 소속으로 유럽 포뮬러 2 챔피언쉽에서 챔피언 타이틀을 가져가는 성과를 기록했다. 더 이상 큰 성과는 없었고, 팀 서티스는 1978년을 끝으로 해체된다.
(존 서티스와 그의 아들 헨리 서티스)
이후 존은 바이크 매장을 운영하며 여러 이벤트에도 참석하면서 지내었고, A1 그랑프리 영국 팀의 팀 프린시펄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3명의 자식을 가졌는데, 자식 중 한 명인 헨리 서티스는 포뮬러 BMW, 포뮬러 르노 2.0, FIA 포뮬러 2 챔피언쉽 등에 참여하며 레이싱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2009년, 2009 FIA 포뮬러 2 챔피언쉽의 4라운드가 열리는 브랜드 해치 서킷이었다. 그의 아들 헨리 역시 챔피언쉽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그렇게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레이스 도중 잭 클라크가 배리어에 충돌하였고, 잭의 차에서 튕겨져 나온 바퀴가 그대로 헨리의 머리를 직격하였다. 그대로 헨리는 바퀴를 맞은 후 배리어에 충돌하였다. 결국 헨리는 뇌사 판정을 받았고, 헨리는 5명의 생명을 살린 장기 기증 후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아들을 기리기 위해 뇌 손상 피해자를 돕고 모터스포츠의 안전을 증진하는 자선 단체인 헨리 서티스 파운데이션을 설립했다. 그리고 몇 년 뒤인 2017년 3월 10일, 그는 런던의 세인트 조지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현재는 그의 고향 서리에 위치한 한 교회에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아들 헨리와 함께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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