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금융은 ‘얼마나 절박한가’보다 ‘얼마나 갚을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총량규제는 가계부채 관리를 명분으로 시행됐지만, 정작 가장 절실한 실수요자들이 제도 밖으로 밀려났다. 대출 문턱은 높아졌고, 고금리 대안만 남았다. 이 시리즈는 ‘총량’이라는 숫자 뒤에 숨겨진 현실을 추적한다. 고금리에 내몰린 청년과 서민, 구조적 배제의 메커니즘, 그리고 복귀조차 허락되지 않는 금융의 자기모순을 다룬다. 정책은 숫자를 관리했지만, 삶은 계산 바깥에 있었다. 규제의 목적은 무엇이며, 금융은 누구를 향해야 할까. 그 질문에서 다시 시작한다. [편집자주] |
[직썰 / 안중열 기자] 총량규제는 숫자를 관리했다. 그러나 금융은 숫자가 아닌 신뢰로 작동해야 한다. 고금리 시대, 실수요자는 제도 밖으로 밀려나고 회복의 경로는 차단됐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준이 아니라, 더 나은 기준이다. 금융 규제는 숫자를 넘어 ‘설계의 영역’으로 진화해야 한다.
◇상환 능력 검증 미흡한 대출심사의 모순
총량규제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은 가계부채의 팽창을 막기 위한 핵심 정책 도구다. 총량규제는 대출 공급 총액을 제한하고, DSR은 개인의 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 비율을 수치화해 개별 심사에 적용한다. 문제는 이 정량적 기준이 현재의 고용 및 소득 구조와 맞물려 실수요자까지 배제한다는 데 있다.
금융기관은 여신 심사 시 연소득, 고용 형태, 신용등급 등 정형화된 정보를 기준으로 삼는다. 이 기준은 중소득 이상 정규직에게는 유리하지만, 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청년 창업자 등 비정형 소득 계층은 자동으로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고정 수입은 없어도 납세 기록이나 통신요금 납부 이력이 성실한 이들조차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결국 금융이 지향해야 할 ‘상환 가능성에 대한 정밀한 판단’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규제는 작동하지만, 그 기초가 되는 ‘신뢰’는 계량되지 못하고 있다.
◇측정할 수 없는 신뢰…한국엔 인프라가 없다
신뢰 기반 금융이 작동하려면 이를 뒷받침할 데이터 인프라가 선행돼야 한다. 하지만 2025년 상반기 기준, 한국의 신용평가에서 비금융 대체 데이터 활용률은 13.6%에 불과하다. 미국(약 40%), 영국(약 38%)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이는 한국 금융이 아직 ‘생활 기반 신뢰’를 반영할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 격차의 배경에는 ▲불명확한 개인정보 보호 규제 해석 ▲공공기관 간 데이터 연계 부족 ▲API 기반 시스템 통합의 부재가 있다. 납세 기록, 통신요금, 임대료 등 생활 데이터는 존재하지만 금융 심사에 실질적으로 활용되기 어려운 구조다.
◇데이터의 조건…신뢰는 검증 가능해야
생활 데이터를 확대 활용할수록 위변조와 오남용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 특히 통신요금, 임대료, 공공요금 등은 민간 플랫폼에 분산돼 있어 금융기관이 진위 여부를 실시간으로 검증할 수 없는 구조적 비대칭에 놓여 있다.
이 문제를 해소할 해법은 ‘공공 인증 기반 연동 인프라’다. 한국인터넷진흥원 관계자는 “민간 데이터는 공공기관의 진본 확인 API와 실시간 연동돼야 하며, 데이터 제공 이력과 평가 결과는 블록체인 기반으로 투명하게 관리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국의 크레딧뷰로(CreditView)는 이런 구조를 통해 사후 분쟁 발생률을 75% 이상 줄였다. 한국 역시 금융기관과 공공기관이 공동으로 ‘데이터 진본 인증 센터’를 설립하고, 공공키 기반 위변조 방지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신뢰는 데이터의 양이 아니라, 진본성과 검증 구조에 의해 완성된다.
◇신뢰의 설계는 공공의 몫
신뢰 기반 평가 체계는 금융기관 혼자서 구축할 수 없다. 수익성과 리스크 회피를 우선시하는 금융사는 회복 가능성이 있는 실수요자마저 보수적으로 배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공이 신뢰의 기준을 설계하고, 민간이 그 기준 위에서 상품을 운용하는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한국신용회복위원회와 금융위원회는 현재 ‘복귀자 전용 보증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고용 형태, 납세 이력, 공공수급 내역 등 다양한 생활 데이터를 기반으로 회복 가능성을 점수화하고, 이를 금융기관과 연결하는 구조다. 신뢰의 구조를 공공이 설계하고 민간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현실적 분업 체계가 구체화되고 있다.
경기도가 2025년 도입한 ‘중신용 복귀 보증제’도 같은 맥락이다. 공공이 보증의 70%를 부담하고, 금융기관이 나머지를 책임지는 방식으로 연체 이력이 있어도 상환 가능성이 입증되면 1금융권 대출이 가능하다. 시행 3개월간 신청자의 38%가 정책금융 상품으로 전환됐다.
서울시가 시행한 ‘청년금융회복 프로그램’도 실험적 의미가 컸다. 통신요금, 공공요금 납부 데이터를 반영한 결과, 6개월 이상 무연체 이력을 가진 참여자의 41.2%가 1금융권 보증 상품으로 전환됐다. 신뢰를 계량화할 수 있다면 회복 경로도 설계 가능하다는 실증 사례다.
◇통제에서 설계로, 숫자에서 신뢰로
총량규제를 폐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규제가 작동해온 방식은 재검토가 필요하다. 허용과 배제라는 이분법적 심사는 회복 가능성을 반영하지 못하며, 절박한 실수요자마저 금융 밖으로 내모는 구조를 고착화시킨다.
이제는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 신뢰를 계량할 수 있는 생활 기반 데이터 인프라, 위변조를 방지할 수 있는 공공 인증 체계, 그리고 공공과 민간이 협업해 신뢰를 제도화할 수 있는 설계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금융은 더 이상 ‘얼마나 빌릴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의 금융은 ‘누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를 판단해야 한다. 숫자에서 구조로, 통제에서 신뢰로. 새로운 금융 설계는 지금부터다.
Copyright ⓒ 직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