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료는 매달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막상 사고가 나면 보험금 못 받는 거 아니에요?"
2023년부터 보험업계에 전면 도입된 회계기준 IFRS17이 시행된 이후 소비자 사이에서 이런 우려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보험사의 회계 기준이 달라졌다는 건 언론 보도나 재무제표 해설서를 통해 들은 적 있지만 그 변화가 내 보험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체감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보험회사의 장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장부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낸 보험료가 회사의 수익이 아니라 '언젠가 돌려줘야 할 돈'으로 계산되기 시작한 것이며 그 기준에 따라 보험사가 상품을 설계하고, 운영하고, 보장하는 방식까지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고객이 납입한 보험료가 대부분 보험사의 수익으로 처리됐다. 예를 들어 월 10만원짜리 건강보험에 가입한 소비자가 있다면 보험사는 이 보험료를 매달 일정 부분만 부채로 쌓아두고 나머지는 이익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IFRS17이 시행되면서 보험사는 이 보험료 전액을 수익이 아닌 부채로 잡아야 한다. 쉽게 말해, 소비자가 낸 보험료는 보험사 입장에서 '언젠가는 보험금이나 해약환급금 등으로 다시 지급해야 할 책임'으로 계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회계 기준이 바뀌면서 보험사의 수익 인식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보험사가 고객에게 약속한 보장을 얼마나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는지를 수치로 보여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CSM(Contractual Service Margin, 계약서비스마진)'이다. 이 CSM은 소비자 입장에서는 다소 낯설지만, 쉽게 말해 보험사가 미래에 이 계약으로부터 얼마나 이익을 낼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CSM이 높다는 건 해당 계약이 미래에도 이익을 낼 여력이 있다는 뜻이고 반대로 CSM이 낮거나 없다는 건 그만큼 손실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한 대형 보험사의 예를 보자. 이 회사가 현재 관리 중인 보험계약은 무려 2억7000만건에 달한다. 국민 전체가 평균 4~5건의 보험에 가입해 있는 셈이다. 이 각각의 계약은 모두 납입 시기, 만기, 보험금 지급 조건이 다르고 어떤 고객은 중도에 해지하기도 하고 어떤 고객은 끝까지 유지하기도 한다. 보험사는 이 계약들 하나하나에 대해 언제 얼마를 지급해야 할지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모두 계산해 장부에 반영해야 한다. 이 복잡한 계산의 결과가 CSM이고, 그것이 바로 보험사의 미래 수익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이 CSM이라는 숫자는 단순 계산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보험사가 소비자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보장을 제공할 수 있는지, 해지율은 얼마나 되는지, 사고율은 어떤지를 종합적으로 예측해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일부 보험사들은 '좋아 보이는 숫자'를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을 설정하거나, 고위험 구조의 상품을 설계해 CSM을 인위적으로 부풀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장기적으로 보험사의 손해율을 높이고, 결국 보험료 인상이나 보장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
이와 함께 도입된 제도가 'K-ICS(Korea Insurance Capital Standard, 신지급여력제도)'다. 이 제도는 보험사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지표로, 쉽게 말해 보험사가 위기 상황에서도 약속한 보험금을 제대로 지급할 수 있는 체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이다. 기존의 RBC(Risk-Based Capital, 위험기준 자기자본 제도)제도가 단순히 '보험사가 자본을 얼마나 쌓았는가'에 집중했다면, K-ICS는 보험사가 직면할 수 있는 수많은 리스크를 실제 시장 조건과 시가 기준으로 평가해 자본 요건을 더 정교하고 엄격하게 계산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금리가 급락하거나 주가가 폭락할 경우 보험사의 자산이 얼마나 줄어들고 이에 따라 부채는 얼마나 늘어날지를 모두 시뮬레이션해 반영해야 한다.
이런 변화는 소비자에게 어떤 의미일까. 겉으로는 보험료가 이전과 똑같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보험사가 금리에 따라 부채 규모가 늘어나고 자본이 줄어들면 새로운 상품을 출시하거나 보장을 확대하는 데 제약이 생긴다. 실제로 일부 보험사들은 IFRS17 도입 이후 고위험 보장 특약을 줄이거나, 해약환급금이 높은 상품의 설계를 축소하는 등 변화를 보이고 있다. 또 자기자본이 부족한 회사는 새로운 보험계약을 늘리는 데도 제한을 받게 돼, 장기적으로 고객 선택권이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듯 IFRS17과 K-ICS는 회계 전문가나 보험사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소비자의 보험료가 어떻게 쓰이고 보험금은 얼마나 안전하게 보장되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특히 보험사들이 내세우는 '높은 이익'이 단지 회계상의 착시인지 아니면 실제로 건전한 영업 결과인지 확인하는 기준이 바로 CSM과 지급여력비율이다.
따라서 소비자 입장에서도 이제는 단순히 보험료가 저렴하다고 덥석 가입하기보다는 해당 보험사의 CSM 공시자료나 K-ICS 지급여력비율 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금융감독원 공시자료나 보험사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보장 지속 가능성을 가늠하는 실마리가 된다.
최연성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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