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안중열 기자] 1997년 ‘금 모으기’ 운동이 국민적 연대의 상징이었다면, 2025년의 하나은행은 장롱 속 금에 흐름을 설계하는 선택을 했다. 그때는 헌납이었다면 지금은 활용이다. 단순 보관 상태에 머물던 실물 자산에 수익성과 유동성을 부여해, 제도 금융 안으로의 편입 실험이다. ‘하나골드신탁’은 금융이 실물자산에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신탁이라는 오래된 제도를 새로운 플랫폼으로 진화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숫자와 그래프로 대표되던 금융이 현실 자산에 닿는 순간, 자산은 상품을 넘어 제도가 되고, 금융은 구조가 된다.
◇금, 감정에서 운용까지…실물에 흐름을 설계하다
하나은행이 선보인 ‘하나골드신탁’은 실물 금을 단순히 보관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감정과 운용, 회수라는 세 단계 절차를 통해 금융 자산으로 전환하는 구조를 갖는다. 고객이 보유한 금은 우선 한국금거래소디지털에셋의 감정을 거쳐 시세를 확인한 뒤, 하나은행의 신탁부가 이를 자산으로 편입해 운용에 들어간다. 일정 기간의 운용 이후에는 원 금속을 고객에게 다시 반환하거나, 매각형을 선택할 경우 감정가 기준으로 바로 현금화할 수 있다.
이 모델의 핵심은 ‘운용형’ 구조다. 금을 팔지 않고도 일정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자산을 지키는 데 초점을 맞추는 고령층이나 보수적 투자자에게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 금을 처분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정기예금처럼 수익을 얻는 구조는 실물 자산의 활용성을 높이는 동시에 기존 금융상품과도 차별화되는 점이다. 이는 실물 자산에도 금융 흐름을 적용할 수 있다는 제도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립된 800톤, ‘장롱 금’의 금융화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국내 가계가 보유한 실물 금은 약 800톤에 달한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실질적으로 금고나 장롱에 보관된 상태로, 금융시장과 단절되어 있다. 이러한 고립은 단지 개인 자산의 활용 부족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계의 현금흐름이 차단되고, 금 유통 구조가 경직되며, 시장의 수급 구조 자체가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고령층의 경우, 금을 ‘언제든 꺼낼 수 있는 유사시 자산’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 인해 금은 자산이면서도 유동화되지 못하는 ‘잠든 돈’으로 남게 된다. 하나골드신탁은 이러한 고립 구조에 흐름을 부여했다. 자산을 매각하지 않고도 일정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운용 방식은 보존성과 유동성이라는 이중의 목표를 모두 충족시키며, 개인 자산의 운용 전략을 넘어 금융 시스템의 재설계를 가능케 하는 출발점으로 작용한다.
◇수요 중심에서 공급 설계로…신탁이 바꾸는 시장
금은 본질적으로 공급이 제한된 자산이다. 전 세계 연간 금 생산량은 일정 수준을 넘기 어려우며, 개인이 보유한 금이 시장에 나오는 경우도 드물다. 이로 인해 금 가격은 실수요보다는 환율, 기준금리, 지정학적 리스크 같은 외부 변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나은행은 이 점에 주목했다. 실물을 직접 유통하지 않더라도, 운용형 신탁 구조를 통해 금의 시장 유동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새로운 공급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실제로 수익이라는 유인은 보유자의 심리적 저항을 낮추고,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금을 굳이 팔지 않더라도 금융 회로에 편입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생긴다면, 경직된 공급 구조에 유연성을 부여하고 시장 안정성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는 수요 기반에만 의존하던 국내 금 시장에 구조적인 공급 설계를 도입한 첫 사례다.
◇‘자산 이전’에서 ‘자산 운용’으로…신탁의 재정의
신탁은 전통적으로 상속이나 증여, 재산 분할처럼 자산을 이전하는 법적 수단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하나골드신탁은 이 같은 기존 인식을 전환하고 있다. 금처럼 활용이 쉽지 않았던 실물 자산을 기반으로, 일정한 수익을 창출해내는 ‘운용형 신탁’의 등장은 신탁을 새로운 자산 플랫폼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고령층이 보유한 실물 자산은 대체로 시장성과 유동성이 낮아, 장기적으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하나은행의 모델처럼 이를 감정–운용–회수의 흐름으로 재설계하면, 실질적인 자산 활용도를 높이는 동시에 노후 재무 구조의 안정성도 강화할 수 있다. 금에 국한되지 않고, 미술품·보석·와인 등 고액 실물 자산군까지 이 구조를 확장할 수 있다면, 이는 연금 시스템을 보완하는 복합형 자산 관리 모델로 진화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신탁, 제도가 되다…하나은행의 전략적 전환
현재 하나골드신탁은 서울 서초금융센터와 영업1부점에서 시범 운영 중이다. 하루 평균 30건 이상이 상담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하나은행은 오는 8월부터 전국 지점으로 단계적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단순한 상품이 아닌, 실물 자산을 제도화하는 플랫폼 사업으로 키우겠다는 전략이 구체화되고 있는 셈이다.
하나은행 신탁부 관계자는 “실물 자산을 제도 금융 회로에 편입시킨 첫 신탁 모델”이라며 “향후 미술품, 보석, 수집품 등 다양한 실물 자산군에 맞춘 맞춤형 신탁을 지속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신탁이 더 이상 특정 목적의 계약 구조에 머무르지 않고, 자산 운용의 플랫폼으로의 진화를 의미한다.
◇실물에 금융이 흐를 때, 금융은 구조가 된다
실물 자산은 오랫동안 금융 시스템의 외곽에 머물러 있었다. 감정은 가능해도 운용이 어렵고, 거래는 가능해도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실물 자산에도 흐름이 설계되고, 그 흐름이 제도 금융과 연결되는 순간, 자산은 상품을 넘어 시스템이 된다.
하나은행의 하나골드신탁은 그 전환의 첫 페이지를 써내려가고 있다. 금융이 숫자와 그래프를 넘어, 현실 자산과 삶의 구조에 닿기 시작했다. 실물 기반 금융이 본격화되는 시대, 금융은 더 이상 추상적 수단이 아니라 실물 경제를 설계하는 구조적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 ‘신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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