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재산을 직접 관리하지 않겠다. 신탁을 통해 공정하게 운용하겠다."
#중증 치매 판정을 받은 70대 후반 아버지를 대신해 성년후견인으로 지정된 큰딸은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법적으로는 후견인인 자신이 아버지의 재산을 직접 관리할 수 있었지만 혹시라도 생길 가족 간 분쟁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하나은행과 '법원 허가형 성년후견지원신탁'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아버지의 부동산을 매각한 뒤 그 자금을 신탁 계좌에 맡기고, 필요한 비용만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거래 내역은 은행을 통해 투명하게 관리되면서 후견인의 자의적 판단 여지를 없앴고, 가족 누구도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완성됐다. 신탁은 이처럼 단순한 자산 관리 수단을 넘어 가족 간 신뢰와 평화를 지키는 제도로 주목받고 있다.
이 사례는 하나은행의 후견지원신탁 서비스가 실제로 작동한 대표적 모델이다. 하나은행은 2010년 금융권 최초로 유언대용신탁 브랜드 '하나 리빙트러스트'를 출시한 이후, 치매·장애·기부·이혼 등 다양한 생애 상황에 대응하는 신탁상품을 확대해 왔다. 치매 진단 전에는 자산 운용 방식과 수익자 설정을 사전 계약으로 정할 수 있고 이후 판단 능력을 상실한 경우에는 법원 허가를 거쳐 성년후견지원신탁으로 전환돼 자산이 안전하게 관리된다. 실제 사례처럼 법원이 허가한 신탁계좌에 부동산 매각 대금을 맡기는 구조는, 후견인의 자의적 처분을 방지하고 가족 간 의혹이나 분쟁 가능성을 줄여준다. 또한 효도 신탁, 자녀보호 신탁, 입주형 신탁 등 생애주기별 설계를 제공하며 법무법인·병원·공익재단 등과 연계해 상속·기부·후견을 아우르는 '가족 자산 보호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령자뿐 아니라 일반 중장년층 고객을 위한 신탁 서비스도 확대되는 추세다. KB국민은행은 지난 7일 '간편형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했다. 유언장 없이도 사망시 지정 수익자에게 자산을 자동 승계할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가입 대상은 만 40세 이상 개인, 최소 가입금액은 1000만원으로 낮췄다. 고액 자산가 중심의 기존 신탁과 달리 절차를 간소화하고 진입 장벽을 낮춰, 누구나 활용 가능한 유산 승계 수단으로 접근성을 넓힌 점이 특징이다. KB국민은행의 기존 대표 상품 'KB위대한유산신탁'은 금전·부동산·유가증권 등 자산 전반을 포괄할 수 있으며 지급청구대리인을 사전 지정해 치매 발생시 대리인이 병원비·요양비 등을 사용할 수 있도록 기능을 보완하고 있다.
농협은행은 지난 5월 'NH 사랑THE 종합유언대용신탁'을 리뉴얼해 상품 가입 기준을 크게 완화했다. 기존 3억원이던 가입 최소금액을 금전 기준 5000만원, 금전 외 자산 합산 1억원으로 낮췄으며, 병원비나 생활비 등 긴급자금이 필요할 경우 중도 인출도 가능하게 설계됐다. 생전에는 위탁자가 자산을 운용하고, 사후에는 수익자에게 자동 승계되는 구조다. 여기에 더해 100만원부터 가입 가능한 'NH 사랑THE 금전유언대용신탁'도 함께 운영 중이다. 이 상품은 지정한 귀속권리자에게 장례비·병원비를 즉시 지급할 수 있으며 일반 금융상품과 달리 상속인 동의 절차 없이도 실행 가능하다. 상조 할인 혜택, 세무상담 제공 등 실질적인 부가 서비스도 더해졌다.
신한은행은 기존 유언대용신탁을 통합 금융플랫폼으로 진화시키고 있다. '토탈 종합재산신탁'은 치매머니를 포함한 고령자 자산을 생애 전체 주기에서 설계·관리할 수 있도록 구성된 상품이다. 건강할 때는 신한라이프를 통해 생명보험·치매보험 가입을 연계하고, 치매 발병 이후에는 신한카드의 시니어 전용 카드로 이상 거래를 감지하거나 요양비 지출을 통제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신한라이프케어를 통한 요양시설 입소 연계, 상조회사와의 제휴, 고령자 돌봄을 위한 AI 휴머노이드 기업과의 협업도 추진되고 있다. 신탁을 중심으로 보험·요양·상속 서비스가 결합된 구조로, 금융권 내에서도 가장 종합적인 시니어케어 전략으로 평가받는다.
우리은행은 '우리내리사랑 신탁' 브랜드 아래 유언대용신탁, 증여신탁, 부동산신탁, 유언공증서보관서비스 등 다양한 신탁 상품을 운영 중이다. 대표 상품인 유언대용신탁은 생전 위탁자가 자산을 맡기고 사후 지정된 수익자에게 재산을 승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금전은 5000만원 이상, 부동산 등 금전 외 자산은 합산 5억원 이상부터 가능하다. 특히 가족 간 상속 분쟁을 예방하거나 사후 절차를 간소화하고자 하는 고객에게 적합하다. 이외에도 수익자에게 원하는 시점에 재산을 효과적으로 이전할 수 있는 '후증여 신탁', 보유세 절감과 부동산 통제를 동시에 고려한 '부동산 신탁', 그리고 치매 등으로 유언 실행이 어려운 상황을 대비해 공증 유언서를 사전 보관하는 '유언공증서 보관서비스'까지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다.
고령자 자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른바 '치매머니'의 제도적 활용 방안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치매 인구는 2023년 기준 124만명이며, 이들이 보유한 자산은 154조원에 달한다. 2050년에는 이 규모가 488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현행 민법상 치매 발병 이후에는 본인 외 누구도 재산을 건드릴 수 없어 병원비조차 꺼내 쓰지 못하고 자산이 묶이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에 따라 금융권은 치매 발병 이전에 신탁 계약을 체결하고 자산 운용 방식과 수익자 지정, 지급 방식 등을 사전에 설정해두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은행업계 관계자는 "신탁은 단지 사후를 준비하는 도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자산을 안전하게 설계하고 보호할 수 있는 살아있는 법적 수단"이라며 "고령자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자산을 계획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맞춤형 서비스를 지속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연성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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