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겉보다 중요한 건 작동 방식이다. 정치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고유한 ‘문법’이 존재한다. 법과 제도의 언어, 권력의 계산, 대중의 심리, 미디어 전략과 정치 언어 등이 어떤 타이밍에 움직이며, 무엇을 감추고 드러내는지는 단순한 논쟁 너머의 작동 규칙을 따른다.
〈정치문법〉은 한국 정치의 핵심 이슈와 정국 전개를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정치 구조, 전략, 심리, 제도 작동 방식의 측면에서 분석해본다. 정치를 이해하고 싶다면, 정치의 문법부터 파악하라.
【투데이신문 박애경 발행인】 정치는 숫자와 말, 명분과 실리, 제도와 감정이 얽힌 종합전술이다. 특히 예산은 정치의 ‘교섭력’을 보여주는 척도다. 지금 국회에서 벌어지는 여야의 추가경정예산(추경) 공방은 단순한 예산 심의가 아니다. 이것은 ‘집권 의지’냐 ‘견제 논리’냐를 가르는 문법 싸움이다.
협치 없이 끝난 표결
이재명 정부가 제출한 31조7천억 원 규모의 추경안이 지난 4일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 출범 한 달 만에 처리된 첫 추경의 진짜 쟁점은 예산의 액수가 아니라 항목과 처리 방식이었다. 본회의 지연, 여당 내 이견, 야당의 표결 불참, 특활비 복원 논란 등은 추경이 단지 '민생 회복 정책 예산'이 아니라 정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격전장임을 보여준다.
이번 추경은 신속 처리되었지만, 전형적인 ‘여야 합의 처리’는 아니었다. 재석의원 182명 가운데 찬성 168명, 반대 3명, 기권 11명. 국민의힘은 표결에 불참했고, 조국혁신당과 개혁신당 일부는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추경은 민주당과 범여권의 정치적 결속으로 통과됐지만, ‘협치 부재’ 속에서 강행 처리된 예산이기도 하다. 절차적 숫자로는 안정적인 가결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다수당의 힘과 소수당의 견제가 부딪혀 갈등만 짙어졌다.
추경안 표결 전후의 상황은 국회가 갈등과 정치적 이해관계의 전시장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국민의힘은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급에 따른 재정건전성 악화와 대통령실 특수활동비(특활비) 복원을 문제 삼으며 표결을 거부했다. 박수민 의원만 반대 토론을 위해 본회의에 참석했고, 나머지 의원들은 회의장을 떠났다.
민주당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검찰 특활비 복원에 대해 당내 반발이 터져 나왔고, 지도부는 본회의를 예정보다 2시간 가까이 미뤄가며 내부 조율에 나섰다.
결국 '검찰개혁 입법이 완료된 후에 집행한다'는 부대의견을 단 수정안을 제출해 진통 끝에 본회의 상정에 성공했다.
하지만 우원식 국회의장은 본회의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의 참석을 기다리며 표결을 또다시 연기했고, 끝내 야당 의원들이 불참하자 오후 10시 55분, 민주당과 범여권만 참여한 상태로 표결을 강행했다.
특활비 논란, 그 너머는 ‘정당성’에 관한 논쟁
이번 추경의 핵심 쟁점 중 하나는 대통령실·검찰 특수활동비 105억 원 복원 문제였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격론이 벌어졌고, '검찰 특활비는 검찰개혁 입법 완료 후에 집행한다'는 부대의견을 조건으로 본회의에 상정됐다.
이날 박수민 의원은 "이재명 대통령은 (과거 민주당 당 대표로 있으면서) 대통령 특수활동비를 일방적으로 삭감했던 과오를 사과하라"며 "국가원수, 군 통수권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손발을 잘랐던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맞서 예결위 민주당 간사인 이소영 의원은 "민주당이 윤석열 임기 1년 차부터 (대통령실 특활비를) 삭감했느냐. 윤석열 정부가 3년간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허구한 날 관저에서 폭탄주나 마신다고 하니 어디에 쓰는지라도 알자고 했던 것 아니냐"라며 "대통령이 멀쩡히 일을 잘했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정치문법적으로 보자면, 특활비는 예산 항목이기 전에 ‘정치의 신뢰성’과 ‘정당성’을 대변하는 상징 자산이다. 과거 야당일 때 전액 삭감했던 예산을 여당이 된 후 복원하는 과정에서 ‘이중 잣대’ 논란과 정당성의 내적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야당일 때는 ‘낭비성 예산’이라 비판하다가, 여당이 되자 ‘불가피한 운영비’라며 되살리는 과정은 유권자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주지 못한다. 결국, 여야 모두에게 ‘정책의 진정성’보다 ‘정치적 유불리’가 우선하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검찰 특활비 복원에 내부 이탈도 감지
범여권 내부에서도 균열이 있었다. 개혁신당 이준석·이주영 의원, 조국혁신당 황운하 의원은 반대표를 던졌고, 민주당 김용민·민형배·장경태 의원, 조국혁신당 박은정·차규근 의원 등은 기권했다.
이들 대부분은 검찰 특활비 복원에 대한 항의 표명을 이유로 삼았다. 결국, 검찰 특활비 논란은 ‘부대의견’이라는 유예 형식으로 수습됐다.
이번 부대의견도 ‘검찰개혁 입법 후 집행’이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이는 실질적인 집행 유예가 아니라 정치적 긴장을 연장한 조항일 뿐이다. 즉, 지금의 국회는 정당 간 협치가 기능하지 않고, 정당 내부 조율도 ‘유보의 정치’로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내부 균열은 추경이 단지 여야 간의 갈등이 아니라, 여당 내부에서도 정치적 신념과 전략이 충돌하고 있다는 증거다. 민생 예산을 둘러싸고 정당 내부에서조차 ‘무엇이 더 책임 있는 태도인가’에 대한 판단이 달랐던 셈이다.
정국 문법은 ‘정책 전선’이 아니라 ‘권력 전선’
추경은 예산정책이지만, 이번 정국은 이를 ‘권력 전선’으로 만들어 냈다. 윤석열 정부 시절 여야가 갈등을 빚었던 특활비, 소비쿠폰, 국방 예산 등의 항목이 이번에도 예산이 아닌 정권 정체성과 연결된 상징 자산으로 작용했다.
이재명 정부는 이번 추경을 통해 ‘국정의 첫 메시지’를 던졌고, 국민의힘은 그것을 ‘불신’과 ‘감시’의 프레임으로 되받아쳤다. 결국 이 정국에서 추경은 ‘돈’이 아니라 ‘정치의 태도’를 말하고 있었다.
이번 추경은 절차적으로 통과됐지만, 앞으로 반복될 정치 갈등의 예고편이기도 하다. 정치는 정책을 논해야 하지만, 한국 정치의 문법은 여전히 ‘정쟁 구조’에 갇힌 협치 불능 시스템이다.
결국 중요한 건 추경의 규모나 항목이 아니다. 정치의 문법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예산도 국민의 신뢰를 받기 어렵고, 어떤 합의도 진짜 합의가 되기 어렵다. 추경안이 통과됐음에도 정치적 갈등이 수습되지 않은 이유는, 그 합의가 ‘법적 절차’가 아니라 ‘정치적 타협’으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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