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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피고인 앤트로픽은 대화형 AI 서비스 클로드(Claude)를 개발하기 위해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가 필요했다. 앤트로픽은 ‘세상의 모든 책’을 영구 보관하겠다는 목표 하에 두 가지 방식으로 도서를 수집했다. 첫째, Books3, LibGen, PiLiMi 등 해적판 사이트에서 약 700만권의 전자책을 무단 다운로드했고, 둘째, 수백만권의 인쇄본을 구매하여 제본을 해체하고 스캔한 후 디지털 파일로 변환했다. 이 과정에서 원고 저자들의 소설과 논픽션 작품들이 복제되어 AI 훈련에 활용되었다. 원고인 Andrea Bartz, Charles Graeber, Kirk Wallace Johnson 등 작가들은 자신들의 저작물이 허락 없이 복제되고 상업적 AI 서비스 개발에 이용된 것은 명백한 저작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반면 앤트로픽은 AI 모델 훈련이라는 혁신적이고 변형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므로 공정 이용에 해당한다고 항변했다.
이러한 대립적 주장에 대해 윌리엄 앨섭(William Alsup) 판사는 저작물 이용 행위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각각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첫 번째로, AI 모델 훈련을 위한 도서 이용에 대해서는 공정 이용을 인정했다. 법원은 이를 ‘극도로 변형적인(exceedingly transformative)’ 이용으로 평가했는데, 저작물이 원래의 표현 그대로 사용자에게 제공되지 않고 단지 언어 패턴 학습을 위한 통계적 관계 매핑에만 활용되었다는 점이 핵심 근거였다. 법원은 “독자가 작가가 되기를 희망하며 작품을 읽고 기억하며 내재화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판시했다.
두 번째로, 구매한 인쇄본의 디지털 변환에 대해서도 공정 이용을 인정했다. 이는 기존 도서를 보관하되 공간 절약과 검색 편의성을 위한 포맷 변경에 불과하며, 새로운 복제본을 생성하거나 외부에 배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소니 베타맥스(Sony Betamax) 사건이나 구글 북스(Google Books) 사건과 유사한 맥락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세 번째로, 해적판 사이트에서 무단 다운로드한 도서의 보관 및 이용에 대해서는 명백한 저작권 침해로 판단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법원이 정당하게 구매할 수 있는 저작물을 해적판으로 획득하는 것은 그 어떤 후속 공정 이용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명시한 부분이다.
이러한 판단은 미국 연방저작권법 제107조의 4요소에 대한 분석에 기반했다. 흥미롭게도 이 4요소는 우리나라 저작권법 제35조의5 제2항에서 규정한 공정이용 판단기준과 거의 동일하다. 미국법과 우리나라 법 모두 ①이용의 목적과 성격 ②저작물의 종류 및 용도 ③이용된 부분의 양과 실질적 중요성 ④저작물의 현재 시장 또는 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핵심 판단요소로 삼고 있다. 이는 2011년 우리나라가 미국식 공정이용 제도를 도입하면서 미국의 판례법리를 적극 수용한 결과이다.
앤트로픽 사건에서 법원은 이용의 목적과 성격에서는 AI 훈련의 변형적 성격을 높이 평가했지만, 해적판 도서를 이용한 ‘중앙 도서관’ 구축은 변형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저작물의 성격에서는 모든 원고 작품이 창작적 표현을 담고 있어 보호 필요성이 크다고 판단했고, 이용된 분량에서는 AI 훈련을 위해서는 전체 작품이 필요했고 이것이 합리적이었다고 보았지만 해적판 도서관 구축을 위해서는 과도한 복제였다고 평가했다. 시장 영향에서는 AI 훈련 자체가 기존 저작물 시장을 대체하지 않지만, 해적판 다운로드는 직접적인 시장 대체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동일한 법적 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판결이 우리나라에 던지는 시사점은 다층적이다. 우리나라의 공정이용 제도는 2011년 도입된 이후 아직 충분한 판례가 축적되지 않아 법적 예측가능성이 낮고, 특히 AI 기술과 관련된 구체적인 적용 사례는 전무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변형적 이용 개념에 대한 우리 법원의 이해와 적용이 미국에 비해 소극적이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변형적 이용을 공정 이용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발전시켜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제한적으로만 인정되고 있다. AI 시대에는 원저작물과 전혀 다른 목적과 방식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어 이에 대한 법리 발전이 시급하다.
더불어 기술적 중간 과정에 대한 명확한 기준 설정이 요구된다. 현행법상 ‘일시적 복제’ 예외는 AI 훈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복제 행위를 포괄하지 못한다. 독일이나 일본처럼 AI 훈련을 위한 별도 예외 조항 신설을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특히 이번 판결이 가장 강조한 것은 혁신적 목적이라도 불법적 수단으로 저작물을 확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므로, 우리나라에서도 AI 기업들이 정당한 라이선스 체계를 통해 학습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하다.
이러한 법적 과제와 함께 저작권자와 AI 기업 간의 상생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는 실무적 과제도 제기된다. 단순히 법적 분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저작권자에게는 새로운 수익 모델을, AI 기업에게는 안정적인 데이터 확보 경로를 제공하는 협력 체계가 필요하다. 예컨대 집중관리단체를 통한 포괄적 라이선스 제도나, AI 훈련 목적에 특화된 저작물 이용 허락 플랫폼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이는 개별적 협상의 거래비용을 절약하면서도 저작권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균형점이 될 수 있다.
결국 앤트로픽 판결은 AI와 저작권의 관계에서 하나의 출발점일 뿐이다. 향후 AI 기술이 더욱 고도화되고 다양한 창작 영역으로 확산되면서 새로운 법적 쟁점들이 계속 대두될 것이다. 특히 생성형 AI가 기존 저작물과 유사한 결과물을 생성하는 경우의 저작권 침해 여부, AI가 생성한 창작물의 저작권 귀속 문제 등은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나라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AI 시대에 적합한 저작권법 체계를 선제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법 개정을 넘어서, 기술 혁신과 창작 보호라는 두 가치 사이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사회적 합의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급변하는 기술 환경 속에서도 창작자의 권익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혁신의 동력을 유지하는 지혜로운 법정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황규호 변호사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미국 카네기멜론대 기계공학 박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변호사시험 2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전문연구원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 인공지능 법제연구단 자문위원 △(현)법무법인 디엘지 변호사 △(현)개인정보보호위원회 개인정보규제심사위원회 민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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