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손성은 기자] 금융권이 ‘상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여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하는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국내 금융산업의 경영철학과 기업지배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회사=경영진’이라는 낡은 공식을 벗어나, ‘회사=주주’라는 새로운 프레임이 법제화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금융권은 사상 초유의 지배구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사 충실 의무’의 재정의…지배구조 대전환 신호탄
여야 대치 속에 표류하던 상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을 가능성이 커졌다. 개정안에 반대해 온 국민의힘이 한발 물러서면서 본회의 통과 가능성이 급부상한 것이다. 여야가 수정 논의를 거쳤지만 핵심 내용인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 확대’는 그대로 유지됐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사의 법적 충성 의무는 기존의 불특정한 ‘회사’에서 실질적 이해관계자인 ‘주주’로 명확히 확대된다. 이는 단순한 조항 변경을 넘어, 국내 기업지배구조의 ‘게임 룰’ 자체가 바뀌는 구조적 변화다. 특히 금융지주사들은 다수의 계열사를 지배하는 복합 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실질적 주인 부재와 경영진 중심의 의사결정이라는 취약한 지배구조를 안고 있다. 이 법안은 그 균형을 뒤흔드는 제도적 기폭제다.
◇경영 판단의 전환…책임과 통제의 무게가 커진다
이사의 충실 의무가 ‘주주’로까지 확장되면, 경영진의 법적 책임은 크게 늘어난다. 특히 인수합병(M&A), 유상증자, 자산 매각 등 주주가치에 직접 연결되는 의사결정에서 소수주주의 권익 침해 문제가 불거질 경우, 배임 책임까지 따를 수 있는 구조가 된다.
이에 따라 금융사의 내부통제 시스템 역시 전면 개편이 불가피하다. 과거에는 ‘경영상 판단’이라는 이름 아래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결정들이, 향후엔 “그 판단이 주주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했는가?”라는 질문을 상시적으로 받아야 하는 시대가 열린다. 경영진은 단기 실적과 장기 가치 간 균형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주주 환원과 밸류업 전략에 제도적 탄력
물론 이 개정안은 단기적으로 경영진에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관점에서 긍정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근 금융지주사들은 주주환원 정책을 강화하고 있으며,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ESG 연계 전략 등으로 투자자 신뢰 회복에 나서고 있다.
상법 개정안은 이러한 흐름에 제도적 추동력을 제공한다. 실제로 시장은 해당 법안의 통과 가능성을 호재로 인식했다. KB, 신한, 하나 등 금융지주 주가는 개정안의 본회의 상정 가능성이 언급된 지난 6월 말부터 강세를 보였다. 김정현 신한운용 ETF사업총괄은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금융지주의 주주환원 정책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며, “정부의 제도 개선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업종인 만큼 대표 수혜 섹터로 부상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제도 연착륙 위한 공적 설계…민관의 시간
한편, 제도의 연착륙을 위해선 정부와 사법부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충실 의무 확대가 자칫 소송 남발과 투자 위축이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의 합리적 경영판단권(BJR)을 존중하는 기준과 공시·보고 체계 정비, 소송 방지 장치 등이 병행돼야 한다.
궁극적으로 이번 개정은 주주의 권리 확대와 경영 투명성 제고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설계의 문제’다. 일방적 책임 부과가 아니라, 장기 투자 생태계로 나아가기 위한 구조적 토대가 되어야 한다. 민관 협의체를 통한 가이드라인 수립과 판례 축적, 금융사의 수용 역량 강화가 함께 이뤄질 때, ‘책임 있는 자본주의’라는 방향성이 제도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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