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금융은 ‘얼마나 절박한가’보다 ‘얼마나 갚을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총량규제는 가계부채 관리를 명분으로 시행됐지만, 정작 가장 절실한 실수요자들이 제도 밖으로 밀려났다. 대출 문턱은 높아졌고, 고금리 대안만 남았다. 이 시리즈는 ‘총량’이라는 숫자 뒤에 숨겨진 현실을 추적한다. 고금리에 내몰린 청년과 서민, 구조적 배제의 메커니즘, 그리고 복귀조차 허락되지 않는 금융의 자기모순을 다룬다. 정책은 숫자를 관리했지만, 삶은 계산 바깥에 있었다. 규제의 목적은 무엇이며, 금융은 누구를 향해야 할까. 그 질문에서 다시 시작한다. [편집자주] |
[직썰 / 안중열 기자] 총량규제는 무너지지 않는다. 한국의 가계부채 총액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05%를 넘겼고, 국제 신용등급 방어와 외국인 자금 이탈 방지를 위해서도 정책 당국은 총량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숫자를 지키는 과정에서 사람은 밀려났다. 청년, 자영업자, 저소득 실수요자는 상환 능력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제도 밖으로 배제됐다. 연체 이력, 비정형 소득, 불완전한 신용 이력은 모두 탈락 사유가 된다.
한국은행은 올해 상반기 보고서에서 총량규제가 실수요자 배제를 유발하고 있다고 공식 인정했다. 전세자금, 의료비, 생계 목적의 대출 거절률은 최근 3년간 1.8배 증가했고, 응답자의 63%는 “대체 금융 수단이 없다”고 답했다. 규제가 실수요자의 복귀 경로를 열지 못한 채 고금리 대안만 남긴 셈이다. 규제는 폐지보다 전환이 필요하다. 총량은 유지하되, 구조는 바꿔야 한다.
◇실수요자 복귀 가능성, 규제 안에 설계하라
기존 규제는 허용과 금지의 이분법으로 작동했다. 정규직이 아니거나 일시적 연체 이력이 있는 경우 대부분 탈락했다. 하지만 실수요자는 이런 기준 바깥에 존재한다. 단순한 소득보다는 삶의 맥락, 대출의 목적, 회복의 가능성이 반영돼야 한다.
모듈형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겨눈다. 소득 유형, 대출 목적, 상환 이력에 따라 DSR 한도를 유연하게 조정하고, 조건에 따라 보증이나 상환 유예 기간을 맞춤 설계한다. 자영업자의 경우 DSR을 60%까지 열어주는 대신, 상환 유예 기간은 줄이고 보증을 의무화하는 식이다. 규제를 완화하는 게 아니라, 리스크를 정밀하게 구획하고 단계별로 통제하는 방식이다.
서울시는 올해 상반기 이 구조를 시범 적용했다. 대상자 1200명 가운데 28.3%가 1금융권 대출로 복귀했다. 다수가 자영업자였고, 상당수는 연체 이력이 있었다. 이 결과는 모듈형 설계가 실수요자의 복귀 사다리를 현실적으로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분법은 배제를 낳고, 모듈화는 회복을 가능케 한다.
◇알고리즘의 시대, 판단 기준 업그레이드 시급
금융은 이미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자동화로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모듈형 심사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판단의 기초가 되는 데이터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신용점수 대신 생활 기반의 신뢰 데이터를 요구한다. 납세 실적, 통신요금 납부 이력, 건강보험료 납부 이력, 고용 형태와 수입 지속성, 소비 패턴 기반의 정규성 등이 주요 평가 항목이다. 이 정보들은 ‘정규직·고소득’이라는 전통적 기준 바깥에서 상환 능력을 입증하는 대체 신호로 작동한다.
하지만 이 데이터는 아직 정확성과 지속성이 부족하다. 민간 플랫폼에 집중된 정보는 위변조 가능성이 있고, 공공기관은 데이터 연동 인프라가 부족하다. 특히 비정형 소득자의 고용 정보는 시점마다 달라지는 만큼 정밀한 해석 체계가 필요하다. 알고리즘은 빠른 심사 시스템이 아니라, 비정형적 삶의 패턴을 읽어내는 해석 장치여야 한다.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알고리즘은 금융이 아니다.
◇회복 경로 없는 규제는 지속 불가능하다
지속 가능한 규제는 회복 경로를 내장해야 한다. 실수요자에게 필요한 건 ‘대출 자체’보다 ‘다시 진입할 수 있는 통로’다. 금융위원회는 2025년 3월부터 회복자 전용 보증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연체자라도 일정 기준의 생활 데이터를 제출하면 보증을 받고, 정책금융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하는 구조다.
‘연체 → 보증형 금융 → 정책금융’으로 이어지는 자동화된 복귀 경로가 설계되고 있다. 과거의 연체 여부 대신, 현재의 성실성과 회복 의지를 평가 기준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이는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이자, 제도권 금융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설계다.
◇규제는 차단이 아닌 구조화된 조정
지금까지의 총량규제는 위험을 차단하는 데 집중했다. 이 방식은 비정형적 위험을 걸러내는 데 효과적이지만, 실수요자도 함께 배제했다. 미래의 규제는 위험을 받아들이되, 구조화해서 통제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모듈형 DSR, 목적 기반 심사, 회복 가능성 평가 구조는 모두 리스크를 세분화하고, 조건별로 조정 가능한 체계를 만드는 시도다.
이 흐름은 규제를 장벽이 아닌 시스템으로 바꾸고 있다. 숫자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도구로서의 규제가 필요하다.
◇더 나은 금융을 위한 구조적 전환
회복 가능한 금융 규제를 만들기 위해선 구조 설계가 바뀌어야 한다. DSR 기준은 고정된 수치가 아니라, 소득 유형, 대출 목적, 상환 이력에 따라 가변형으로 재설계돼야 한다. 생활 데이터를 신뢰할 수 있는 공공 인증 체계로 관리하고, 민간 플랫폼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국세청, 통신사, 건보공단과 연계된 정보 구조를 기반으로 정밀한 심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회복자 보증 시스템과 정책금융을 연결하는 디지털 플랫폼은 자동 심사, 자동 전환, 자동 추천이 가능한 경로로 설계돼야 한다. 이 구조는 단순한 행정 개선이 아니라, 금융 철학의 재정립이다. 규제는 배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회복을 설계하는 체계여야 한다.
◇규제는 숫자가 아닌 라이프 설계
총량규제는 계속된다. 그러나 그 안에 어떤 판단 기준을 담을지, 어떤 구조를 설계할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렸다. 실수요자를 배제하지 않고 회복 가능한 금융을 만들어야 한다. 숫자 중심의 통제가 아닌, 사람 중심의 설계가 필요하다.
금융은 사람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능성을 설계하는 제도여야 한다. 절박함을 외면하는 금융이 아니라, 회복을 기다리는 금융. 규제가 더 강해질 것이냐, 금융이 더 나아질 것이냐. 선택의 시간은 지금이다.
Copyright ⓒ 직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