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김남근 기자, 자료제공/㈜제이월드]
파란만장 흙수저, K-분장차 업계 ‘1등’이 되다
사진=김남근 기자
세계적인 배우 톰 크루즈가 유명해지기 전 촬영장에서 ‘Casting Trailer’(한국명: 분장차/이하 분장차)의 규모와 위치, 동선 등의 문제로 제작진에게 강하게 항의한 일화는, 분장차의 중요성이 부각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어느 국가보다 배우 예우가 좋은 미국 영화 제작 환경임에도 연기자에 대한 본격적인 배려 시스템이 장착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할리우드에는 예전보다 더 좋은 컨디션으로 주연배우뿐만 아니라, 조연, 단역에게까지 분장차가 제공되었고, 그들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수건, 조명, 향수, 음료 세팅까지 개별적인 취향에 맞추어, 그들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비밀스러운 각 제작사 역량의 척도가 됐고, 미국 영화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분야로 자리 잡고 있다.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분장차에 대한 시장 규모가 커지고, 세계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아 가던 그 시기에 대한민국의 실정은 어땠을까? 90년대 후반 한국 영화는 수출은 고사하고, 국내 흥행도 규모나 내용 면에서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였다. 당연히 이에 대해 아는 이가 없었을 때, 분장차에 대한 필요성을 외치며 맨발로 제작사를 찾아 영업을 시작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현재의 K팝, K광고 등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 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석준 ㈜제이월드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여러 매체와 방송에서 출연 제의가 있었음에도, 사업의 특성상 지금까지는 사용처 비밀 유지, 보안, 고객의 신비주의 보호, 사생팬으로부터의 안전 보호 차원에서 방송이나 매체의 섭외를 거절해 왔다. 하지만 분장차 분야의 개척자인 이 대표는 “오늘날 K팝 부흥의 대표주자인 블랙핑크, BTS 등 수많은 실력 있는 K뮤지션들이 있기까지는 기획·연출·영상·조명·음악·안무·미술 같은 주요 산업군과, 분장·헤어·의상·경호·엔터인력 등과 같은 셀럽 밀착 전문인력은 물론 현장의 수많은 필수차량의 운전요원·로케이션메니져·밥차·발전차·커피차·봉고·연출차·방역팀 등 무대 뒤 음지에서도 이들의 활약이 있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라며 “그래서 사람과 스토리를 중요시하는 이슈메이커의 취재에 흔쾌히 응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책임감을 내비쳤다. 이에 지난 23년 동안 꾸준히 한 분야를 개척하고 확장시킨, 대한민국 촬영 산업의 숨은 공로자이자 과거의 자신과 같은 사회의 마이너리티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세상에는 아직 성공할 길이 너무 많다’, ‘어둠 속에서 길이 보이지 않아 출발조차 못 하는 아웃사이더들에게 정상을 비춰주는 서치라이트가 되주고 싶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흙수저 출신 ㈜제이월드 이석준 대표의 처절한 인생스토리를 심도 있게 이슈메이커에서 최초로 담아보기로 했다.
부모의 경력이나 자신의 학력으로, 평생 자신을 증명하려는 이들과 반대의 길을 가다
이석준 대표의 유년 시절은(청량리 홍파초등학교) 평범한 또래 아이들의 성장과는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뭔가 특별한 아이도 아니었다. 2남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이혼을 겪은 후 친부와 살았지만, 대부분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굶지 않고 온전히 학교에 다니려면 무엇이든 한가지는 잘해야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터득한 조숙한 아이였다. 학업 환경은 전무했고, 집은 가난했다. 인물은 평범했고, 특기는 없었다. “당시에는 덩치 크고 싸움을 잘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싸움을 잘하는 것이 강한 것이라고 믿게 됐어요. 그리고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도 했죠”라고 담담히 말문을 이어가는 그의 눈빛에, 냉혹한 현실 속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이 비쳐 보이는 듯했다.
이혼 상태의 결손가정에서 부모의 관리가 있을 리 만무한 초등학생 시절, 그에게 ‘청량리588’ 뒷골목은 놀이터이자 안식처였고, 비슷한 처지의 형들과 악다구니처럼 생존의 기술을 익히며 자연스럽게 ‘스스로 강해지는 것’만이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소년 시절 동대문의 이른바 지역 ‘오야지’가 된 이 대표 앞에는 뜻밖에 진로가 펼쳐진다.
1980년, 예비고사 폐지 후 학력고사(지역학군제도)가 막 시작된 시기로, 동급생들은 가까운 곳의 중학교로 진학하게 됐는데, 이 대표는 엉뚱하게도 도봉구에 있는 명문중학교인 신일중학교로 배정이 된 것이다. 미션스쿨이었기에 수업 전 기도수업은 물론 교복 착용과 바른생활 관리 등 모든 것이 낯선 환경에 놓인 이 대표는 또 다른 ‘힘’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싸움짱’보다 ‘공부짱’이 더 강하다는 것이었다. 싸움짱은 그 학교에서 그냥 문제아로 낙인찍힐 뿐이었고, 결코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동급생은 그야말로 ‘신’이었고, ‘세력’이었다. ‘성적’의 힘을 알게 된 그는 이때부터 공부에 몰입했고, 중학교에 이어 역시 그 당시 명문 사립 고등학교인 종로의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공부에 전념해 명문대 진학을 꿈꾸던 그때까지 강하다고 굳게 믿고 있던, ‘싸움
<공부><성적’보다 더 강한 것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재력’, 즉 ‘돈의 힘’이었다. 그 시절 중앙고등학교는 국내 대기업인 현대가의 자제들이 졸업한 학교로, 당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재야 각계각층 상위 레벨 집안의 선배와 동기가 많이 재학 중이었다. 흙수저인 이 대표가 쌍코피 터져라 공부하고 대학을 졸업해 좋은 직장에 취직해도, 기업의 임원이나 경영진은 되기 힘들다는 동기생들의 부모와 선배들의 대화로 알게 됐던 것이다. 그토록 궁금했던, ‘진정한 힘’의 피라미드 꼭대기를 마침내 보게 된 것이었다. 대표는 회상했다.<>성적’보다>공부><성적’보다>성적’보다>
“암담한 그 시절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평생 돈 많이 벌며 존경받고 노후도 걱정 없는 길이 딱 3개가 보이더군요. 하나는 법대를 나와서 판검사가 되는 것. 둘째는 의대를 나와서 의사가 되는 것. 셋째는 창업을 해서 재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게는 모두 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나마 세 번째는 ‘혹시…?’라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하하.”
그렇다. 그가 내린 결론은 ‘돈벌이’였고, 첫 번째 행동은 남들보다 빨리 돈을 모으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서 ‘중졸’, ‘고교 중퇴’는 엄청난 역경이나, 사건이 아니고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고등학교 졸업은 시키고 보자’는 정서가 만연했던 터이기에 당시 담임선생님을 포함한 이 대표의 주변에서는 ‘사회에서 낙오된다’며 극구 만류를 했지만, 이미 그의 시선은 학교 밖 담장 너머로 가 있었고, 배운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배워 나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 대표는 ‘일상의 평온과 안일을 박차고 나니 덜컥 겁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설레여서 좋았다’라고 회상하며, 갑자기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업의 성공과 사랑의 성공에는 공통점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무엇인 줄 아시냐?’고 물었고, ‘열 가지도 부족할 텐데 한가지라니…?’라는 생각이 들며 기자 본인의 궁금증은 더해갔다. 그리고 그 답은 바로 ‘설렘’이었다. 떠올리면 설레야 하고, 그 대상이 사람이든, 일이든, 무엇이든 그래야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그래야만 역경을 극복해 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방황하던 고교자퇴 청년,
신기하고 이상한 나라 ‘골프’를 만나게 되다.
이석준 대표는 “돈은 벌기 위해 마음먹는 그 순간부터, 돈 쓸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남들 하는 만큼 다 사고, 남들보다 앞서려는 생각은, 그 생각 자체가 되먹지 않은 망상이다. 자본주의의 살벌한 소비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비로소 돈은 모이기 시작한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학교를 떠난 이 대표는 아르바이트 알선업체에 등록하고, 거의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힘들었지만 ‘고난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믿고 지독하게 아끼며 돈을 모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기는데, 그동안 멀리서나마 응원해 주던 어머니와 형님이 교통사고로 한날한시에 사망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일로 부친도 몸져눕게 되어, 생계를 위해 부친이 운영하던 성남에 작은 복사가게를 맡아 운영하게 된다. 그렇게 슬픔과 좌절로 방황의 청소년기를 보내게 됐고, 밤낮으로 일해도 늘지 않는 집안 사정과 쌓여 가는 과로에 지쳐 희망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때, 우연히 벼룩시장 구인 광고 글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고급 파티복과 룸살롱 홀복, 연예인 무대복 등을 제작·판매하는 특이한 의류업체에서 올라온 영업사원 모집 글이었다. 바로 지원하여 취직했고, 의류에는 전혀 문외한임에도, 어린 시절 청량리 뒷골목에서 담배 심부름을 하며 조숙해진 경험을 무기로 강남 한복판 유흥가 밀집 지역에서 방문 판매사원 중 최고 판매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당시 경쟁 업체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지만, 의리로 거절한 뒤 자신이 따르던 팀장이 창업한 회사(세라피코)로 이직 후 관리자의 직급까지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너의 가족만이 할 수 있었던 주요 업무와 미수금 회수 업무를 20대 초반의 나이에 맡게 되는데, 이때부터 강남 화류계의 적나라한 이면과 정·관계와 연루된 연예인들, 한국 호스트바 계보, 텐프로 최고 대마담 및 새끼마담 양성 과정의 기획과 교육도 맡게 되는 등 어둡고 거친 환경에서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경험을 그곳에서 하게 된다. 그곳에만 존재하는 여러 금전 사고와 선수들과의 스캔들 한번 없이 맡은 업무를 100% 달성하게 되자, 업계에 소문이 나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와 안정을 보장받는 영업부장이나 인원 관리부장으로 제의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제안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미녀들과 술, 돈, 도박, 밤의 화려함 등에는 전혀 설렘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수많은 밤의 스토리를 만들며 지내던 중에 우연히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삼성동 어느 길가 그물망 쳐진 건물 뒤편을 지나던 중, 누가 봐도 노동자와 같은 외모와 말투로 벤츠에서 내린 노인에게, 부유해 보이는 사모님들과 주변 사람들이 90도로 인사하며 존경과 친절을 베푸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물어보니, ‘프로님’이라는 답을 듣고 처음에는 프로레슬링 선수인 줄 알았다고 한다. 나중에 ‘골프 프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순간 이 대표는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치게 됐다. 판사, 의사, 재벌 외에도 평생 돈 많이 벌고, 존경받고, 안정적인 직업. 바로 프로 골퍼의 세계를 알게 된 것이다. 그의 시선에서는 당시 프로 골퍼는 말이 직업이지, 때잔디 밟으며 산책하고 자연 즐기면서, 운동도 하고, 돈도 벌면서 평생 존경받는 신의 직장,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하늘 아래 이런 직업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동안 아르바이트와 회사 일을 하며 벌어놓은 밑천으로, 골프 선수가 되고자 여기저기 수소문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인 90년도 초반에 한국에서 골프는 극소수 최상류층만 즐기던 그야말로 귀족 스포츠였고, 학교나 학원은 전무했던 실정이었다. 그나마 찾은 길은 당시의 현역 프로 선수의 수하생으로 들어가 몇 년을 배우는 길이 있었는데, 이들 무리에 들어가는 것 또한 하늘의 별 따기였고, 이 외의 지역을 대표하는 경상, 전라, 강원, 충청, 제주 출신 프로들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바닥부터 생활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였다. 그렇게 높은 진입장벽인 골프계 입문의 두터운 벽도,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대표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수소문 끝에 여의도에 위치한 한국프로골프협회를 무작정 방문하게 됐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관계자분의 도움으로 부유한 집 자녀나 아마추어대회 입상자 학생에게도 어렵다는 골프 유학의 최신 정보를 얻게 된다. 그분은 협회의 간부였고, 고교 중퇴자이자 골프에 ‘골’자도 모르는 청량리 출신의 청년이 골프를 진심으로 배워보고자 스스로 찾아왔다는 패기를 기특하게 여겨 막 개교한 미국 캘리포니아 뮤리에타(Murrieta)에 있는 PGCC(Professional Golfers Career College)의 진학 방법을 알려주게 된다. 그리고 ‘이미 현지에서 수업 중인 한국 학생도 있고 미국 교포들도 학교에 있으니, 그곳에 가기만 하면 해볼 만할 것이다’라며 용기도 주었지만, 미국 유학의 길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 그 자체였다. 유학비자(F-1) 신청 준비로 유학 자격 서류 발급을 위해 교육청을 방문해 보니 그가 검정고시생 출신의 미국 골프 유학 대한민국 1호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도 흙수저 출신이 스스로 번 돈으로 현지에 친척이나 지인도 전혀 없이 혈혈단신으로 말이다. 교육청 관계자들도 처음 만들어 보는 대한민국 교육부 발행 영문 검정고시 고교졸업 자격 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건네주면서 신기해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마도 힘들 것’이라고 했다.
미국대학으로부터 I-20(입학허가서)를 운 좋게 받는다 해도, 대부분 미국 대사관 인터뷰에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당시 학생 불법체류자들이 너무 많이 생겨서 강력한 귀국 보증과 완벽한 서류에도 영어를 못하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대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저 협회의 그분이 알려준 코스대로만 준비했고, 회사도 그만두어 한정된 예산에서 지출만 있던 터라, 틈틈이 아르바이트하며 모든 과정을 신속하고 완벽하게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미국에 간다고 해도 학비와 기숙사비, 생활비로 겨우 1년을 버틸 액수가 전 재산이었다. 졸업은 어떻게 하고, 무엇을 먹고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 막막했지만, 그냥 저질렀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부딪치니 신기하게도 남들은 몇 년 걸리는 미국 유학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학교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협회에서 소개해 준 남 박사의 도움으로 입학허가서를 받는 데 성공했고, 이사부터 주변정리, 유학준비, 귀국보증, 재산보증, 신원보증, 영어회화독학, 인터뷰 예상 질문연습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처럼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까다로운 인터뷰를 신들린 듯이 패스해 버렸고, 마침내 드디어 미국 F1 비자를 받게 된다. 그렇게 그는 태어나 처음 타보는 대한항공 여객기를 타고 1993년 8월 미국 LA를 향해 김포공항을 힘차게 이륙하게 된다.
문득, 당시 인터뷰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궁금해져 질문을 던진 기자의 물음에 이 대표는 “너무 긴장돼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10분 정도 빠르게 주고받은 질문과 약간 버벅된 답변의 끝에, 백인 면접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Give me a Chance, Sir. I’m goner Show you Soon. Green Jacket on My Shoulder on TV”라고 했다며 그는 피식 웃었다.
한 줌 재가 되어 날아간 미래의 포부와 준비한 모든 것들.
골프채 한번 잡아본 적 없는 검정고시생이 곧 미국 골프대회에서 우승하여 TV에 나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 하며, 그렇게 그는 20대 초반, 처음으로 결혼도 생각했던 첫사랑마저 뒤로한 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미국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 첫사랑은 9년의 연애 끝에 그의 아내가 되어 1녀 1남의 엄마이자 화목한 가정의 안주인이 되어있다.
미국 본토의 학교에 도착 후 그의 노력은 실로 엄청났다. 처음 잡아보는 중고 골프채로 밤 늦도록 기숙사 뒷마당 풀밭에서 손바닥 허물이 다 벗겨질 때까지 비 오듯 땀 흘리며 스윙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됐다. 한국에서 골프계 사람들이나 연습생들과 악수했을 때, 손가락 마디마디와 손바닥이 왜 그렇게 딱딱 했는지를. 그것은 바로 연습으로 만들어진 굳은살, 즉 ‘골프계 고수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는 놀랍게도 학생들이 밤마다 그 ‘표시’를 칼로 깎아내고 있는 게 아닌가.
“정말 알면 알수록,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웠어요. 골프라는 운동이 미치겠더라고요. 모든 게 반대였어요. 순간 ‘아차’ 싶었어요. 좀 쳐보고 올걸. 날아오는 공도 치는데, 멈춰있는 공을 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 내 자신의 무지가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악전고투하며 지내던 어느 날, 또다시 불행이 닥쳐왔다. 이번엔 화재였다. 숙소였던 기숙사 화재로, 가지고 온 돈과 짐, 옷 등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고 만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학교 연습장에 있던 터라 입고 있던 옷과 클럽이 그가 가진 전부가 된다. 거지가 된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표 값도 없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다시 한번 보내던 중, 골프 학교에서 운명 같은 고마운 친구인 ‘승재’를 만나, 그 친구의 도움으로 숙박과 식사를 해결하고 학교를 계속해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오전 수업에 이어 오후는 연습과 라운딩, 저녁에는 애나하임에 한인이 운영하는 낡은 주유소에서 야간 근무(Graveyard shift) 일을 하게 됐다. 야간 일을 하며 미국 이민자 가정의 교포 2.5세대 제임스도 친한 후배가 되어 많은 도움을 받으며 잠시 안정을 찾게 되었고, 그즈음 학교 친구들과 기분 전환을 하자며 할리우드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물론 ‘깍두기’로 간 것이다. 그때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하며 신기해했던, 영화 세트장 앞 길게 늘어선 트레일러 행렬이 훗날 이 대표의 인생 사업이 될 것이라고 그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겨우 유학 생활을 이어 나갔으나, 밤샘 근무 중 갱들과의 실랑이와 노숙자, 음주자들과의 갈등, 주유소 캐셔 업무와 학업·생계와 자취생활에 점점 지쳐갔고, 주말에도 틈틈이 세차 아르바이트와 CANON카메라 수리점 알바를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유학 비용에 이도 저도 아닌 생활을 하며 서서히 말라비틀어져 가는, 마른 나뭇가지 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어떻게 해서든지 유학 생활의 진퇴를 결정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학비와 체류비를 조속히 벌고자 일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한인 신문에 나온 초고임금 1인 선착순 구인 광고를 읽고 지원하여 합격이 된다. 그 글을 본 순간, ‘이건 나를 위한 신의 도움이다’라고 느꼈고, 겁도 없이 미국에서 학교를 또다시 자퇴하고 현지인도 모르는 알래스카 노틱써클(북극권) 안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우뚜끄타운’으로 가는 경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고임금’이라는 희망에서 시작된 알래스카 여정. 이번엔 불과 반대인 추위와 얼음의 알래스카 풍토병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돈도 다 쓰게 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한 것에 감사하며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게 된다. 바닷길이 없는 그곳은 모든 물자를 항공으로 공수를 받아 물가가 내륙의 3배였는데, 원주민들은 생필품을 주로 배달로 받았으며, 그는 이를 배달하는 한인 리커스토어 겸 야식·피자집 배달원으로 고용된 것이었다. 추위와 열악한 환경, 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 도로, 그리고 주민 중 범죄자와 마약쟁이들이 많아 배달인이 집 앞에 도착하면, 자신이 주문한 것도 잊어버리고, 침입자로 오인해 총을 쏘는 일이 종종 있던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그래도 그곳은 미국 주정부의 지원이 풍부했기에, 야간까지 배달로 폭리를 취해 부를 쌓아가던 한인 업주는 인건비를 줄이는 수법으로 이곳의 사정을 모르는 내륙의 유학생들이나 불법체류자들을 딜리버리맨으로 고용해, 신분의 약점을 이용하여 임금을 갈취하였는데, 여기에 이 대표가 낚인 것이었다.
분수를 몰라 실패한 미국 유학생,
일본 좌핸들 자동차로 인생을 유턴하다.
그렇게 이석준 대표의 꺼져가던 청춘을 다시 일으켜준 사람은, 시카고에 PGCC로 유학을 와서 만난 ‘준영이 형’이었다. 이유도 묻지 않고 자신을 받아줬고, 그 형의 집에서 3일 내내 잠들었다고 한다. 그 의리와 온정으로 다시 기운을 차린 이 대표는 주노형이 소개해 준 주유소에서 일하며, 이번에는 미국 부동산경매를 소개하는 한글 소개서와 명리학으로 사주를 우편으로 봐주는 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해 한국으로 돌아갈 경비 전액과 7천 불을 모아, 3년 6개월 만에 다시 쓸쓸히 귀국하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돌고 돌아 한국으로 돌아온 대한민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부친의 빚과 암담한 현실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쌓인 내공이 있어 좌절하지 않고 중고 1톤 트럭을 구입해 성남 도촌동에서 회원제로 약수와 지하수를 배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빚을 갚으며 악전고투 하던 중, 미국으로 떠나기 전 압구정동의 직장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의 인연과 우연이 겹쳐 삼성동에서 일본 중고차 미쓰비시 FTO 한대를 수입해 판매하게 되면서, 이번엔 중고 수입 자동차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특이한 디자인과 세련됨으로 일본 중고차는 좌핸들의 불편함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선불을 주고도 몇 달씩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그야말로 ‘대박’이 난 것이다. 그러나 구매한 고객들이 톨케이트 출입과 주차 등의 불편으로 차량을 되파는 일이 많아졌고, 이를 극복 하고자 좌핸들 위치를 우리나라처럼 우핸들로 개조하기 위해 공업사에서 먹고 자며 차량의 분해·조립·허가·인증·부품 제조·맞춤·구조변경·형식 승인 등을 스스로 알아가며 전문가 수준의 지식과 경험을 쌓게 되지만, 그동안 벌어놓은 돈은 또 바닥이 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소품 차를 구입하러 온 영화 조감독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는 훗날 한국영화 역대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인 ‘친구’의 피디가 되는 유능한 조원장 피디다. 이후로 둘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사이가 되는데, 중고 수입차주들과 영화 제작부의 중간에서 영화에 필요한 소품차·폭파용차·사고 장면에 필요한 차들·배경이 되는 주차된 차·주인공 차 등을 적재적소에 구매하여 현장에 배치하고 보증·관리해 주는 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소품을 구하는 쪽은 차량을 모두 구매할 필요가 없기에, 비용 절약의 차원에 원하는 차 몇 대를 준비해 주니, 제작사 측에서는 획기적인 대안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관할 필요도, 이전할 필요도, 인원을 추가로 채용할 필요도 없어 제작 비용과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었고, 차를 판매하는 쪽에서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 빌려주며 부수적인 수입이 발생 되고, 촬영이 끝나면 다시 팔아 이익이 극대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이 대표가 개발한 것이다. 또한, 주요 스태프와 감독 등을 대상으로 업무용 차량 판매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양측의 중간에서 자본 없이도 단기간에 꽤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가 성공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에 빚도 탕감하고 안정된 자리를 잡아 가게 되었고, 그즈음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조 피디와 대화를 나누던 중 ‘한겨울에 배우들의 대기실 얘기’가 나오면서, 미국에서 우연히 보며 신기해했던 할리우드 스튜디오 앞에 트레일러군단을 떠올리게 된다. 바야흐로 ㈜제이월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제이월드
직수입에도 좌절된 분장차의 꿈, 한국형으로 다시 탄생시키다.
분장차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본 이석준 대표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일은 과거의 골프처럼 결코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중고 트레일러와 캠핑카를 독일과 미국에서 수입했지만, 인증, 즉 국내 번호판을 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화성에 위치한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성능시험연구소를 집 드나들 듯이 다니면서 일제 중고차의 노하우로 총력을 다해 인증 조건을 맞춰보려 했으나, 끝내는 ‘도로 폭 불일치 인증 불가’ 판정을 뒤집지 못하고 만다. 그렇게 또 영화 차량 중계로 모은 자금을 대부분 소진하며,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인증 가능 크기와 무게의 트레일러를 수입하기만 하면 됐었는데, 이번에는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남은 돈으로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현실화 시키고자 국내로 눈을 돌린다.
궁하면 찾는다고 했던가. 그렇게 찾은 해법은 미군부대 매각물건 구입처 등록 후 부평에서 미군기지 내 군용지휘차량을 고물값에 낙찰받은 후 개조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제이월드의 1세대 분장차이자, 국내 1호 박스 분장차가 탄생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일본으로 역수출한 반텍 캠핑카를 개조한 2호를 내놓았고, 조달청에서 나오는 이동도서관 미니버스를 개조해 분장차 3호를 촬영 현장에 투입하게 된다. 국내 실정과 도로 환경에 맞는 구조변경을 통해 국내형 분장차 사업을 시작하여, 다수의 장편 상업 영화는 물론 방탄소년단(BTS)의 첫 뮤직비디오 등에 차량이 투입되었고, 현재까지 한국영화와 광고, 뮤비, 의전, 대통령 선거 등 주요 행사에서 공간임대로 그날 주인공의 첫 준비와 휴식, 그리고 끝마무리까지 없어서는 안 될 운송 및 공간 장비로서 자리를 굳건히 다지게 됐다. 이 과정에서 숱한 냉대와 오해가 생겨났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이를 설득하고 손해를 감내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고, 그렇게 ㈜제이월드는 오늘날 국내에 분장차 산업이 자리 잡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대표는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외국에 비해 짧은 수명의 한국 스타들을 보며, 별이 별답게 반짝일 수 있도록, 현장에서 주인공과 배우·가수들을 더 대우하고, 더 배려하면 좋겠고, 배우·가수 관련 스태프들이 더 존중받고 안락하게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그런 그가 지금은 우연히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은인인 유용진 대표를 만나, 전차량 리모델링으로 3세대 J분장차 17대 라인을 유지하며, 4세대 전기 트럭, 전기버스로 넘어가는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해 차량이 아닌 무공해, 무인 시스템 빌드 이동구조물을 개발 중이고, K팝 아카데미사업을 연계하여 눈·비·강풍이 부는 초대형 실내 스튜디오 사업 등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이 대표의 머릿속은 가득 차 있다.
이 대표는 “한국은 전 세계에서 콘텐츠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가 되었지만, 촬영 현장의 기반 시설과 인력대우는 아직도 열악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해외로 많이 나갑니다. 이는 곧 국력 낭비죠. 아레나 규모의 공연장은 당장 시급한 과제인데, 왜 대형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나서지 않는지 안타까워요. 공동투자 운영 조건으로 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면 부지나 투자도 어렵지 않게 진행될 텐데 말이죠. 제가 서로 다리라도 놔주고 싶네요”라며 착잡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제가 할리우드에서 가져오고 싶은 것은 차량 장비나 기술도 있지만, 여유 있는 제작 시간과 구성원 간에 한결같은 시스템으로 보장되는 배려와 존중의 문화와 제가 구상하는 스탭들과 함께 발전하고 같이 성장하는 콘텐츠 지분 배당제인데, 아직도 이 분야에는 패러다임만 바꾸면 블루오션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라고 덧붙였다. AI와 K촬영장 노하우가 결합된 신사업도 이미 구상이 끝난 상태라 말하는 그는 아이디어의 실현 시기와 방법에 있어 고민이 많다고 기자에 토로했다.
지킬 두 가지만 있으면, 누구라도 행복할 수 있다.
지킬 사람 한 명과 지킬 자기 소신 하나.
이석준 대표에게 분장차는 창작자와 산업 사이의 틈을 메우는 다리이며, 현장의 리듬을 조율하는 조용한 혁신의 공간이다. 그는 지금도 꾸준히 차량 내부의 구조를 개선하고, 아티스트와 스태프들의 피드백을 반영해 기능을 업데이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표의 관심사는 단순히 매출 증대와 사업확장에 있지 않다.
“저는 나이 들어서도 장난기를 잃고 싶지 않아요. 인생은 일단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변이 점점 너무 진지해지고, 경직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특히 이혼하겠다는 부부가 너무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혼 전문가, 변호사들이 무슨 구원자인 마냥 활개를 치고, 사회가 이혼을 부추기는 것 같아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서라도 이러한 현실에 맞서볼까 합니다. 강연이나 상담을 통해서라도요.”
‘이혼 방지연구소라도 차려야겠다’는 이 대표의 말에 기자 본인은 ‘아니, 이혼 방지 연구소? 갑자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뚱맞고 혼란스러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인터뷰와는 별개로 한 남편이자 사회인으로 깊은 공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기혼자들의 가치관이란 결혼 생활 유지와 가족의 성장에 있지, 결코 이별과 새로운 시작에 있지 않다. 행복은 돈이 아니라 철학이 선행돼야 하고, 결혼도 마찬가지’라며, 그렇게 행복과 사랑의 유지 방법과 현대 도시 생활 안에서 화해와 해법의 길을 찾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감에 따라 늘상 인터뷰 끝에 묻던 회사 비전과 향후 계획은 질문하지 않기로 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무수한 도전과 좌절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이석준 대표의 경험들이 돈벌이와 성공의 수단으로도 활용되기를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인들의 자본주의에 지친 행복 지표와 꼬이고 묶인 인간관계와 소통의 여정에 좋은 길 안내자로 쓰이면 좋겠다는 바람이 문득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입장과 미움이 자리 잡아 서로 좋았던 순간들을 묻어버리고, 스스로 고통받은 많은 연인과 부부들에게 화해와 해후로 이어질 견고한 연결 고리가 될 것 같다는 좋은 기분도 들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 대표가 걸어온 묵직한 인생 흔적의 길 위를 차분히 정리 해보니,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래를 설계해 온 그의 삶의 기록은, 오늘날 열악한 촬영 현장의 수많은 스태프와 종사자, 배우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시작됐고, 그들의 추위와 더위만이라도 막아줄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분장차 사업을 탄생시켰다. 이처럼 미래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더욱 빛나게 해주었던, 한 시대를 빛낸 스타들처럼, 그렇게 다른 곳, 다른 이름으로 ‘오늘’이라는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작은 반딧불인 소시민들에게 위안과 힘이 될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기쁘고 고마운 기대가 생기게 되었다.
* 분장차: 로케(야외촬영)가 많은 영화 및 미디어 산업에서 배우와 스태프들이 더위와 추위에도 안전하고 편하게 의상, 분장, 휴식, 식사 등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개별 이동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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