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잇따른 보조배터리 폭발에도 사고 핵심 원인은 공개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사고가 배터리 내부 ‘셀(Cell)’의 수명 저하나 결함과 관련 있다고 말하지만, 소비자는 어떤 셀이 쓰였는지 알 수 없고 설명서나 홈페이지 어디에도 셀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소비자에게 사고를 피할 최소한의 정보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조배터리는 위험을 가늠할 기준 없이 유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소방청 국가화재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는 총 612건. 항공기 내 보조배터리 화재는 같은 기간 총 13건 발생했으며 2023~2024년 사이에만 11건이 집중돼 급증세를 보였다. 원인은 과충전, 외부 충격, 내부 단락 등 다양한데 셀의 수명이나 성능 저하, 손상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분석이다.
‘셀(cell)’은 충·방전을 반복하며 열과 압력을 견뎌야 하는 배터리의 핵심 부품이다. 같은 5000mAh 제품이라도 어떤 셀을 쓰느냐에 따라 실제 용량, 충전 효율, 발열 안정성이 달라진다. 저가형 셀은 수십 회 충·방전에 그친다. 반면, 고급형 셀은 수백 회 이상 견딜 수 있어 셀의 품질이 제품 수명과 안전성을 좌우한다.
하지만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는 제품 중 ‘이 제품에는 어떤 셀이 사용됐는가’를 명시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소비자는 긴 수명을 기대하고 제품을 구매하지만, 실제로는 저가 셀이 들어간 제품을 쓰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일부 제조사는 유통 비용을 고려해 성능 수명이 짧은 셀을 탑재하기도 한다. 셀 등급이 낮을수록 발열·팽창·누액 등 위험이 커지지만 ‘영업기밀’이라는 이유로 셀 정보는 공개되지 않는다. 국내 보조배터리 제조 관계자는 “업계 전체가 치킨게임처럼 가격만 낮추는 경쟁에 몰리다 보니 셀을 공개하면 오히려 원가 부담이 드러나 불리해진다”며 “좋은 셀을 써도 숨기고, 나쁜 셀을 써도 숨기는 구조가 굳어졌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정보 비공개는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 보조배터리 시장은 제품 간 가격 경쟁이 치열한 데다 셀 품질은 대부분의 소비자에게 알려지지 않아 구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단가 절감과 유통 비용 확보가 우선시되는 구조 속에서 셀 정보는 마케팅 자산이 아닌 원가 공개 부담으로 여겨진다.
KC 인증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국내 유일의 공식 안전 인증이지만, 제품의 전기·물리적 기본 안전성만 확인할 뿐 셀의 수명, 발열 안정성, 충격 내구성 등은 검사 대상이 아니다. 외형 중심 인증 항목에 그쳐 성능이나 내구성이 전혀 다른 제품이 동일한 인증 마크로 유통될 수 있다.
이처럼 KC 인증이 ‘겉모습’에 치중하게 된 배경엔 제도 설계의 한계가 있다. 중소 제조사의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절차를 간소화하면서 핵심 부품에 대한 심층 검사는 빠졌다. 산업 진흥과 소비자 보호 사이에서 결국 소비자 안전은 제조사의 자율성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해외 사례와 비교하면 격차는 더 뚜렷하다. 미국 UL 인증은 단락, 고온 노출, 과충전 등 실제 환경을 반영한 테스트를 요구하고, 유럽 CE 인증도 화재 방지, 전자파 차단 등 다층적 기준을 갖춘다. 반면, KC 인증은 일부 항목에서 제조사 자체 검사만으로 통과할 수 있으며 제품 안전책임자 실명 등록도 의무가 아니다. ‘자율검사제도’가 셀 검증의 사각지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그럼에도 정부는 별다른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가기술표준원은 전기차 배터리를 중심으로 정보 공개와 인증 강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보조배터리 같은 소비자용 소형 전자기기는 제도 논의에서 배제돼 있다. 셀 정보 공개, 인증 항목 확대, 실명제 도입 등은 정책 의제로 다뤄지지 않아 사고가 반복돼도 소비자의 정보 접근권과 선택권은 제도 밖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피해는 대부분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리콜이나 보상이 이뤄진 사례는 삼성·LG·애플 등 대형 브랜드에 국한됐다. 반면 저가형·비브랜드 보조배터리는 사고 발생 시 제조사를 확인하기 어려워 보상 체계도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다. 셀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 제품 선택 과정에서 생긴 피해도 소비자가 입증하거나 책임을 묻기 어려운 구조다.
한 소비자는 “보조배터리는 보통 2년 주기로 교체하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언제 셀 수명이 다 되는지 알 방법이 없다”며 “잔여 용량처럼 셀 수명도 눈에 보이게 표시된다면 사고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전문가들은 제도 개편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지적한다. 국내 보조배터리 관계자는 “KC 인증이 셀 성능을 보지 않는 건 자동차에서 엔진을 검사하지 않는 것과 같다”며 “제품 외관만으로는 반복되는 사고를 막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충·방전 수명, 발열 안정성처럼 사고와 직결되는 항목을 인증 체계에 포함하고, 셀 실명제 등 정보 공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며 “소비자가 위험을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부터 제도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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