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고 목표를 세우는데 정해진 것은 없다. ‘꿈은 허황되지 않게 이룰 수 있는 것만 꿔라’ 또는 ‘현실에 맞지 않고 실현 가능하지 않은 목표는 세우지 마라’ 등 미리 한계를 설정하고 가능한 것만 구상한다면, 그것은 이미 꿈도 목표도 아니다.
'꿈과 목표는 허황될수록 좋다. 불가능한 목표를 세울수록 큰 성취를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인물들이 증명하고 있다.
베아테 우제(Beate Uhse. 1919~2001). 무일푼으로 시작해 세계 최대의 성인용품 사업으로 역사적 성공을 일궈낸 인물이다.
하지만 우제가 성공을 일궈내기까지 수천 건의 소송전은 물론 사회적 선입견에 따른 부정적 시선과 맞써야 했다. 그래서 우제는 성별의 차별 등 관습과 금기에 저항해 큰 부를 일구고 성공 신화를 써낸 대표적 여성으로 꼽힌다.
우제는 일생 동안 일반적인 사회 통념과 전혀 다른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에서 태어난 우제가 고향인 헤세 지역에서 열린 투창 대회에서 우승한 건 15살 때였다. 16살에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겠다며 학교를 그만 뒀다. 그리고 17살에 비행훈련 학교에 등록했을 때 60명의 학생 중 여자는 그녀가 유일했다.
우제는 비행학교에서 남자들도 어려운 비행훈련을 모두 통과했다. 그녀가 통과한 훈련 과정은 200여회의 이착륙 훈련, 고도 비행과 목표물 접근, 300km 장거리 비행 등이었다. 이같은 과정을 거친 그녀는 마침내 A2 항공기 조종사 자격증을 따냈다. 1937년 그녀가 18살 때였다.
이듬해인 1938년에는 곡예비행 조종사 시험에도 통과한 우제는 뷔커(Buecker) 항공기의 제안으로 비행기 생산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우제가 일했던 비행기 생산공장의 생산직 근로자와 정비공은 2000여명, 우제는 유일한 여자 직원있었다.
우제의 비행 실력이 빛을 발한 것은 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5년 독일 공군 수송기 중대에서 활약한 우제는 같은 해 4월 22일 소련의 적색군(Red Army)이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 비행기로 그곳을 탈출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우제가 사업가로 변신한 건 전쟁이 끝난 후였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우제에게 어린 아들을 키울 수 있는 생계 수단이 필요했다.
우제는 사업 아이템을 고민하던 중 주변 친구들로 부터 전쟁에서 남편이 돌아 온 뒤 임신을 하게 된 사례가 많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당시 패전으로 경제가 어려웠던 독일에서 아이를 원하는 부부는 거의 없었다.
우제는 많은 독일 부부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실제 당시 독일에서 콘돔은 구하기 어려웠고 피임약이 출시된 건 10여년이 한참 지나서였다.
이때 우제가 생각한 것은 '책'이었다. 타자기로 조악하게 편집해 처음 만든 우제의 첫 책 제목은 '슈리프트 X'(문서 X). 내용은 여성의 생리주기가 여러 단계로 나뉜다는 점에 착안해 배란일을 계산하는 '크나우스 오기노'(Knaus-Ogino) 피임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몇 페이지 안 돼는 '소책자' 형태의 '슈리프트 X'를 인쇄하기 위해 우제가 인쇄소에 지불한 것은 버터 5파운드(약 2.5kg). 전쟁 직후인 독일에서 화폐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쇄한 초판은 2000부. 우편용 전단지 1만부도 포함됐다.
우제의 첫 책은 결과적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화폐개혁 후 1부당 1마르크에 판매한 소책자의 판매부수는 3년이 채 안 돼 3만7000부를 넘어섰다. 그리고 이 책을 기반으로 우제는 성교육 책자와 콘돔을 판매하는 회사도 세웠다.
특히 우제의 '금기시된 사업'은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더욱 번창하기에 이르렀다. 아예 '섹스'에 대한 조언을 편지로 상담해주는 사업도 시작했다.
이 사업으로 우제가 받은 수천통의 편지에는 '금기시된 고민'에 은밀한 답을 구하고 싶은 질문들의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나는 여성상위를 아내와 관계할 때 해보고 싶다. 그런데 아내는 이상하다며 거부한다. 정말 이상한가?"라는 내용이었다.
우제의 섹스 상담 사업은 대박을 터트렸다. 1953년 14명의 직원으로 36만 마르크(한화 약 2억원 추정)였던 매출은 4년만에 200만 마르크(한화 약 20억원 추정)로 약를 넘어섰고 60여만명의 고객을 확보하겠 됐다.
그리고 이 사업은 훗날 우제가 오늘날 성인용품점과 같은 '베아테우제 주식회사'를 세우고 향후 50여년간 독일 '섹스 산업의 대모'로 불리는데 결정적인 기반이 됐다.
짐작했겠지만 우제의 사업은 당연히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실제 우제는 수천건의 소송과 사회 일각의 비난에 맞써야 했다. 가부장적인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먼저 섹스에 관한 담론을 이끌어내고 관련 용품을 만들어 사업화까지 시킨다는 건 당국의 제재를 받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검찰과 경찰의 조사와 기소 그리고 각종 소송은 우제의 사업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시 독일 사회 분위기는 성과 관련된 주제를 드러내 놓는 걸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경찰은 우제에게 콘돔을 주문한 고객 주소를 압수하기 위해 찾아왔고, 우제는 곧바로 체포되기도 했다. 미혼 고객에게 콘돔이 판매됐을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독일에서는 미혼 커플간 섹스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혼 고객에게 콘돔을 판매한 것은 간음을 조장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어느날 검찰은 우제를 '성욕을 인위적으로 과도하게 자극했다'는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여기에 카톨릭교회 등 종교계와 정치인, 사회단체의 비난도 일상적이었다. 모두 전통이라는 이름의 관습에 저항한 우제의 사업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가부장의 관습에서 발상을 전환한 우제의 사업은 결국 사회적 공감과 인정을 이끌어냈다. 우제가 사망한 2001년 독일 언론은 그녀에 대해 "독일 섹스산업의 대모이자 가장 지명도 있는 주요 기업인"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금도 '베아테 우제'는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 성인용품점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우제가 1996년 베를린 한복판에 세운 '에로틱 박물관'은 전 세계에서 수집한 수천여점의 섹스관련 용품들을 전시해 매년 수만명이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됐다.
전쟁과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편견을 깨고 과감히 자신의 신념으로 사업을 일궈낸 '베아테우제'. 그리고 그녀는 실제 금기에 도전해 성공을 이룬 역사적 사업가로 기억되고 있다.
배충현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Copyright ⓒ 비즈니스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