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데일리포스트=김정은 기자ㅣ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은 가운데, 본래 마취제로 사용되던 ‘케타민’이 증상을 빠르게 완화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주목받고 있다.
특히 케타민이 뇌 속 ‘계층 구조’를 바꿔 굳어진 사고 틀을 깨뜨린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평소 잘 연결되지 않던 뇌 영역들이 케타민 투여 후 활발히 소통하며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지난 6월 19일 ‘사이키델릭 과학 2025 (Psychedelic Science 2025)’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이번 연구는 살아있는 사람 뇌에서 케타민이 ‘신경 가소성’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살폈다. 신경 가소성이란, 경험을 통해 뇌가 새로운 연결과 경로를 형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아직 초기 단계 연구로 동료 심사를 거치지 않았지만, 케타민 한 번의 투여만으로도 우울증 증상이 몇 시간 내 빠르게 호전된다는 임상 결과가 이미 여러 차례 보고된 바 있어 기대가 크다.
◆ 케타민이 바꾸는 뇌의 소통 구조
연구진은 11명의 남성 참가자 뇌를 영상 기술로 스캔한 뒤 케타민을 정맥 주사했다. 그리고 24시간과 7일 후 다시 스캔하며 뇌 변화를 관찰했다. 뇌는 보통 감각 정보를 하위 네트워크에서 받아 상위 네트워크로 전달하는데, 상위-하위 네트워크 간 소통은 네트워크 내부 소통보다 적은 편이다.
놀랍게도 케타민 투여 후 특정 네트워크 내 활동은 비동기화됐고, 대신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와 ‘신체 감각 네트워크’ 같은 하위 감각 네트워크 간 소통이 증가했다. 이는 기본 감각 처리 영역이 복잡한 사고를 담당하는 상위 영역과 더 직접적이고 폭넓게 연결됐다는 의미다.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신경과학자 클라우디오 아뇨렐리(Claudio Agnorelli) 박사는 “평소 상위-하위 네트워크 사이에는 분리가 크지만, 케타민 투여 후 그 계층 구조가 무너졌다”고 설명했다.
◆ 뇌 네트워크 재편으로 찾아온 마음의 유연성
우울증과 연관이 깊은 DMN은 평소 계획이나 몽상을 담당한다. 연구진은 뇌 신호 전달에 관여하는 SV2A 단백질 수치를 PET(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 스캔으로 측정했다. 이 단백질 수치가 높으면 뇌 세포 간 연결이 많다는 뜻이다.
전체 SV2A 수치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DMN과 연결된 후두상 피질(PCC)에서는 분명한 변화가 관찰됐다. PCC는 뇌의 정보 흐름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는데, 케타민 투여 후에는 이 기능이 줄어든 반면, 시냅스 연결은 오히려 증가했다.
케타민 클리닉스 로스앤젤레스 CEO 샘 만델(Sam Mandel)은 “DMN 내 시냅스 밀도 증가는 케타민이 새로운 시냅스를 만드는 것뿐 아니라 뇌 네트워크 소통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신호”라며, “이 ‘피질 계층의 평탄화’가 환자들이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났다고 느끼는 이유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이번 연구는 참가자 수가 적고 위약군이 없으며, 영상 기법 자체도 아직 검증 중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 실험에서 입증된 케타민의 신경 가소성 효과를 살아 있는 인간에게서 직접 확인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클라우디오 아뇨렐리 박사는 “이번 연구는 케타민이 인간의 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고, 샘 만델 CEO는 “살아 있는 인간 뇌의 시냅스 변화를 직접 시각화한 것은 획기적인 진전”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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