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손성은 기자]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등장이 가시화되면서, 은행권이 새로운 금융 질서 속 생존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정치권이 디지털자산 제도화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전통 금융기관들은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시장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전방위적인 대응에 나섰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주요 은행들의 상표권 출원 러시다. 지난 23일 KB국민은행이 국내 시중은행 중 처음으로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표 17건을 출원했고, 같은 날 하나은행과 카카오뱅크도 각각 48건, 12건을 출원하며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는 단순한 마케팅 목적을 넘어 향후 발행 및 서비스 기반 구축을 위한 선제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더불어민주당이 이달 초 발의한 ‘디지털자산기본법’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이 법안은 자기자본 5억원 이상 국내 법인에게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은행 등 민간 금융기관의 시장 진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첫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은행권 입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은 기회이자 위기다. 장기 저금리 기조와 예대마진 축소가 불가피한 환경 속에서, 스테이블코인 발행은 수익 다변화의 유력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통화 1:1 연동 구조를 전제로 하는 스테이블코인은 발행 기관이 실물자산 기반의 준비금을 운용하게 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자수익 창출이 가능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스테이블코인 경쟁력을 증명한 대표 사례는 테더(Tether)다. 테더는 고객의 현금과 국채 등 실물자산을 준비금으로 구성해 이를 운용했고, 2024년 한 해 동안 약 130억달러(한화 약 17조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국내 은행들도 유사한 구조를 통해 디지털 기반 예치금을 운용하게 될 경우, 새로운 수익원 확보와 함께 운용 능력에 따른 경쟁력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나리오는 은행이 시장의 주도자로 부상할 경우에만 가능한 이야기다. 만약 빅테크나 핀테크 사업자에게 선점 기회를 빼앗긴다면, 은행은 기존 금융 생태계에서의 핵심 기능을 급격히 상실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디지털 자산을 넘어 결제 수단으로 기능하며, 이용자들은 은행 계좌나 신용카드 없이도 간편하게 결제할 수 있다. 특히 편의성과 혜택이 우수한 서비스가 시장을 선도할 경우, 은행에 머물러 있던 자금은 타 금융기관이나 빅테크 계열 플랫폼으로 급격히 이동할 수 있다. 이는 곧 예금 기반 유동성 구조의 약화를 의미하며, 자금 조달 비용 증가와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시중은행들의 상표권 출원은 시장 지배를 위한 ‘공격적’인 조치라기보다는, 디지털 인프라 측면에서 이미 우위를 점한 빅테크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라는 평가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름을 먼저 확보하는 행위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발행 역량과 서비스 설계이며, 현재로선 전통 금융권이 빅테크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진단했다.
스테이블코인 경쟁력은 결국 디지털 인프라의 완성도, 스마트컨트랙트 기반 운영 역량, 실시간 회계 및 감사 체계, 이용자 친화적인 서비스 구조 등에서 판가름난다. 이러한 기술 기반 역량은 전통 금융권이 아직까지 취약한 분야다. 단순히 ‘코인을 발행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신뢰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가’가 진입 이후의 생존을 좌우하게 된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은 고빈도 결제와 실시간 정산이 핵심인 만큼, 기술적 결함이나 보안 문제 발생 시 은행의 브랜드 가치까지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여기에 한국은행이 추진 중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정책과의 경합 가능성도 변수다. CBDC는 금융안정과 통화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공공 프로젝트인 반면, 민간 스테이블코인은 이용자 편의성과 수익성 극대화를 우선하는 시장 주도형 수단이다. 두 시스템이 병존할 경우 지급결제 체계의 이중화, 이용자 혼선, 규제 충돌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으며,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 따라 은행권의 스테이블코인 전략도 조정이 불가피하다.
이처럼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신사업’이 아니라, 은행 중심 금융산업 구조를 뒤흔드는 판을 바꾸는 변수다. 은행이 이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누구보다 빠르게 디지털 전환을 이뤄내고, 정교한 신뢰 설계와 UX를 구축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용자 선택을 읽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은행의 생존 시계는 조용히, 그러나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다.
Copyright ⓒ 직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