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계절, 차가운 국물의 매력
한여름이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차가운 국물’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여름 음식인 냉면, 오이냉국, 열무국수는 불볕더위 속에서 잃은 입맛을 되찾게 해주는 기특한 음식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가운 국물 음식’은 한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도 고유한 방식으로 찬 국수를 즐기고 있다. 계절의 지혜와 문화의 미각이 만나, 한 그릇 안에 각 나라의 기후와 생활 방식이 녹아든다.
한국의 냉면은 사실 겨울 음식이었다. 평양냉면은 원래 평양 지역의 겨울철 별미로, 차가운 동치미 국물에 메밀면을 말아 먹었다. 차가운 육수를 먹는 문화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 겨울의 자연 냉기를 활용한 슬기로운 식생활이었다. 6.25 전쟁 이후 피란민들과 함께 남하한 냉면은 남한에서 여름 음식으로 재해석되었다. 특히 서울과 부산에서 전문 냉면집이 생기며 계절이 바뀌었고, 여름철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함흥냉면은 전쟁 이후의 또 다른 재해석이다. 감자나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쫄깃한 면에 매콤한 고추장 양념을 얹은 형태는 실제 함흥 사람들도 낯설어한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던 실향민들이 남한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추억의 냉면이 지금은 전국적으로 사랑받는 음식이 된 것이다.
동양의 여름 면발들: 일본과 중국의 냉면 문화
일본의 냉면 문화도 흥미롭다. ‘히야시츄카(冷やし中華)'는 사실 전통 음식이라기보다는 20세기 중반 요코하마의 한 중화 요릿집이 개발한 신메뉴였다. 냉장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무더운 여름철 고객 유치를 위해 탄생한 요리였던 셈이다.
면 위에 달걀지단, 햄, 오이채, 토마토를 얹고 간장이나 참깨 소스를 부어 먹는 이 음식은 일본의 여름 한정 음식 문화와 맞물려 국민적인 사랑을 받게 되었다. 지금도 여름이 되면 식당마다 “히야시츄카 시작했습니다”라는 간판이 걸리는 건 그 유산이다.
'소멘(素麺)'은 더 오래된 역사적 뿌리를 지닌 음식이다. 헤이안 시대(8~12세기) 귀족들의 식탁에 올라갈 정도로 고급 음식이었고, 정갈하고 희고 가는 면발은 ‘깨끗함’과 ‘순결’을 상징하기도 했다.
여름에 대나무 통을 타고 흐르는 면을 건져 먹는 ‘나가시 소멘’은 20세기 후반에 관광지에서 체험형 이벤트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맛이 아니라 ‘여름의 놀이 문화’로 면 요리를 확장한 흥미로운 사례다.
중국의 '량미엔(凉面)'은 그 기원이 오래되진 않지만, 각 지역의 향신료 문화와 만난 후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특히 쓰촨성의 량미엔은 ‘맵고 차가운 음식은 위에 좋지 않다’는 동양 의학의 관념에도 불구하고 여름철 필수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재미있는 점은, 쓰촨의 매운 량미엔은 땀을 흘리며 먹기 때문에 몸의 열을 식힌다는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뜨거운 음식을 먹고 시원해지자는,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음식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지중해부터 동남아까지, 세계는 지금 냉면 중
유럽과 미국의 냉국 문화는 국물보다 ‘샐러드 스타일’이 주를 이룬다. 이탈리아의 '파스타 프레다(Pasta Fredda)'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바쁜 도시인들의 ‘빠른 점심’으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아 먹을 수 있으면서도 신선한 재료로 건강함을 강조한 이 스타일은, 여름철뿐 아니라 웰빙 식단의 대명사로도 각광받는다.
프랑스 파리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아침 식사 대신 차가운 파스타를 자주 먹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고전적인 크루아상보다 실용적이고 자유로운 식사를 지향한 그에게 냉 파스타는 어쩌면 철학만큼이나 깔끔하고 명쾌한 음식이었을지도 모른다.
‘태국의 얌운센(Yam Woon Sen)’은 열대 기후에서 온 ‘냉채 스타일’의 대표 주자다. 역사적으로 왕실 연회에서 ‘덜 기름지고, 더 산뜻한’ 요리를 선보이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설도 있다. 당면이라는 가볍고 투명한 면에 새우, 라임, 고수를 더한 얌운센은 현대에는 동남아 여행객들의 ‘잊을 수 없는 맛’으로 남아 있다. 특히 태국에선 이 요리를 입맛이 떨어졌을 때 ‘약 대신’ 먹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미국에서도 냉면류는 최근 들어 점점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건강을 중시하는 캘리포니아 비건 레스토랑에서는 한국식 비빔냉면을 두부, 아보카도, 글루텐프리 면으로 재해석해 ‘쿨 누들 샐러드’로 메뉴화하고 있다. 한식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여름 냉면 역시 국경을 넘어 ‘지속 가능한 웰빙 식사’로 자리 잡는 중이다.
여름 한 그릇, 국경을 넘는 시원함인 냉국과 찬 국수는 단순한 계절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기후에 적응한 지혜이자 역사 속에서 피어난 문화의 맛이다. 한 그릇의 차가운 국수에는 기술의 발전, 전쟁의 흔적, 관광의 발달, 그리고 음식 철학이 녹아 있다.
지금, 이 순간 한 그릇의 냉면을 앞에 두고 있다면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함께 세계의 여름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여성경제신문 전지영 푸드칼럼니스트( foodnetwor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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