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전시현 기자] 법은 아직 없고 코인도 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름’은 벌써 다 가져갔다. 그것도 원화(KRW)를 얍삽하게 비틀어 만든 가상자산 이름들이다.
카카오페이가 스테이블코인 시장 제도화에 앞서 원화 연동형 코인 명칭을 무더기로 상표 출원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법적 논란과 함께 조롱 섞인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20일 지식재산정보 검색서비스(KIPRIS)에 따르면 카카오페이는 지난 17일 ‘PKRW’, ‘KKRW’, ‘KRWP’, ‘KPKRW’, ‘KRWKP’ 등 총 18건의 상표를 출원했다. 분류는 전자기기(09류), 금융서비스(36류), IT개발(42류) 등으로 스테이블코인 사업 전반을 겨냥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마디로 아직 시작도 안 한 게임의 ‘제목’을 먼저 선점해 둔 셈이다.
◆ 공공기호도 사유화? “KRW도 우리가 쓴다”
문제가 된 핵심은 ‘KRW’다. 전 세계 외환시장에서 사용되는 대한민국 원화의 국제 통화 약어다. 이처럼 공공성을 지닌 기호를 민간기업이 상표권으로 등록해 독점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상식 밖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국내 상표법은 공공기관 명칭, 국가명, 통화명칭처럼 ‘공익적 성격을 띠는 명칭’에 대해 사기업의 사적 독점을 제한하고 있다. 유럽연합(EUIPO)이나 미국 특허청(USPTO)에서도 KRW·USD·JPY 등 통화약어는 공공재로 분류돼 등록 자체가 기각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카카오페이는 ‘KRW’ 앞뒤에 자음 몇 자를 붙이거나 순서를 뒤섞은 조합을 통해 변형 상표로 출원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법망을 교묘하게 비껴간 얍삽한 플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 법도 나오기 전인데…상표 찜질방 된 코인시장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상표 출원이 시장 질서를 흐트러뜨릴 가능성이다. 스테이블코인 법안은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않았고 발행 기준도 확정되지 않았다. 제도권이 문도 열기 전에 대형 플랫폼이 통화 기호를 앞다퉈 상표권으로 선점하면 후발 사업자는 진입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핀테크 업계 한 관계자는 “이건 마치 집을 짓기도 전에 주소부터 다 등록해 놓고 ‘여긴 내 땅이야’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은행권 역시 카카오페이의 선점 움직임에 반발해 스테이블코인 공동법인 설립 논의를 본격화한 상태다.
특허청은 이와 관련해 “출원 상표는 현재 심사 중이며 공공성 침해 여부, 식별력, 소비자 혼동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등록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심사를 통과하더라도 ‘공익 침해’ 혹은 ‘식별력 없음’ 등의 사유로 상표심사위원회 단계에서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 시각이다.
◆ 얄밉게 법망 틈새로 들어간 ‘상표 장사’
카카오페이 관계자는 “스테이블코인 관련해 선제적으로 상표를 확보해 둔 것일 뿐 구체적인 사업계획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업계는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표권 선점은 사실상 시장 독점 전략을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한 법조계 인사는 “상표 등록은 브랜드 보호 목적이 아니라 진입장벽 구축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며 “카카오페이의 이번 출원은 소비자 보호보다는 경쟁 견제를 위한 얍삽한 전략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한편 투자자들은 이를 호재로 받아들였다. 카카오페이 주가는 상표권 출원 사실이 알려진 지난 17일 상한가(+29.85%)를 기록했다. 규제도 코인도 사업계획도 없이 이름만으로도 시장 반응을 끌어낸 셈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제도화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그러나 그 시작점이 특정 기업의 상표 선점 경쟁과 공공자산 사유화 시도로 얼룩진다면 제도화의 취지는 퇴색된다.
이와 관련해 업계 전문가들은 “KRW는 국가 통화의 약어로 국민경제와 직접 연결된 공공 자산”이라며 “이런 상징적 기호까지 사기업이 사전 점유하려는 시도는 법적 문제 이전에 시장 윤리와 상식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코인도, 법도 없는 상태에서 이름부터 선점하겠다는 접근은 결국 시장 신뢰를 훼손하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며 “상표보다 앞서, 상식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Copyright ⓒ 한스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