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금융은 ‘얼마나 절박한가’보다 ‘얼마나 갚을 수 있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총량규제는 가계부채 관리를 명분으로 시행됐지만, 정작 가장 절실한 실수요자들이 제도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대출 문턱은 높아졌고, 고금리 대안만 남았습니다. 이 시리즈는 ‘총량’이라는 숫자 뒤에 숨겨진 현실을 추적한다. 고금리에 내몰린 청년과 서민, 구조적 배제의 메커니즘, 그리고 복귀조차 허락되지 않는 금융의 자기모순을 다룹니다. 정책은 숫자를 관리했지만, 삶은 계산 바깥에 있었습니다. 규제의 목적은 무엇이며, 금융은 누구를 향해야 할까요? 그 질문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편집자주] |
[직썰 / 안중열 기자] “한 번 밀려난 금융의 문턱은 다시 오르기 어렵다.” 신용점수가 깎이고, 연체 이력이 남고, 제도권 대출이 막히면 그다음 선택지는 늘 고금리다. 이 흐름을 끊지 못하면 개인의 신용은 물론, 사회의 금융 포용성도 회복될 수 없다. 지금은 실수요자의 ‘복귀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설계하는 일이 중요하다.
◇‘금융 사다리’는 왜 사라졌나
금융 사다리는 낮은 단계에서 시작해 점차 신용을 회복하며 제도권 금융으로 복귀하는 구조를 뜻한다. 과거에는 ‘은행→저축은행→대부업’ 등 계단식 이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단이 무너졌다. 신용 점수가 하락한 차주는 대부업, 카드론 등 고금리 대출에 의존하게 되고, 이후 아무리 성실히 상환하더라도 제도권 진입은 요원하다.
핵심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다. 소득 대비 총부채 원리금 비율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하는 이 제도는 부실 차단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실수요자의 복귀 경로를 막는 결정적 장벽이 됐다. DSR 산정에는 비제도권 채무가 반영되지 않지만, 대출 원리금은 포함된다. 실질 상환 능력은 개선됐더라도 수치상 조건은 악화된 채로 남는다.
2024년 NICE신용평가 자료에 따르면, 카드론 1년 이상 장기 이용자 중 68.4%는 최근 2년간 제도권 대출 승인을 받지 못했다. 금융이 신용 회복의 통로가 아닌, 고금리의 덫이 된 셈이다.
◇‘단계별 복귀 모델’은 가능하다
금융 사다리를 복원하려면 ‘단계별 진입 모델’이 필요하다. 서울시와 K저축은행, 서울신용보증재단이 함께 운영 중인 ‘청년금융회복 지원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연체 이력이 있는 청년층을 대상으로 소액(최대 300만원), 단기(최대 12개월) 조건의 대출을 제공하며, 통신비·임대료 납부 등 비금융 데이터를 활용해 신용을 평가한다.
해당 프로그램에 참여한 6개월 이상 무연체 상환자 423명 중 41.2%는 1금융권의 보증상품으로 전환 기회를 얻었다. ‘실패 이력’보다 ‘회복 가능성’을 중심에 둔 평가 구조다.
실제 사례도 있다. 서울 거주 20대 청년 김모 씨는 과거 단기 연체로 인해 신용도가 하락하며 1금융권 대출에서 거절당했다. 그러나 통신요금과 주거비를 성실히 납부한 이력이 반영돼 K저축은행의 소액 대출을 받은 뒤, 6개월간 정상 상환을 지속했다. 이 상환 이력은 서울신용보증재단의 보증 심사에 활용됐고, 김 씨는 시중은행의 정책금융상품으로 대출 전환에 성공했다.
◇신용회복 플랫폼, 제도화가 열쇠
2024년 4월, 금융위원회는 금융포용정책의 일환으로 ‘신용회복 플랫폼’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기존의 신용회복위원회 중심 상담·조정 기능을 디지털화하고, 민간 플랫폼과 연계해 개인 맞춤형 회복 경로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핵심은 ‘데이터 기반 회복 경로 설계’다. 납부 이력, 근로계약, 공공지원 내역 등 다양한 행정 데이터를 통합 분석해 상환 가능성과 의지를 파악하고, 이에 적합한 금융상품을 자동 추천·연계한다. 일정 기간 이상 성실 상환 이력이 쌓이면, 보증형 정책금융으로 자동 이행되는 시스템도 검토 중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단기 소액 상품과 상환 경험이 누적되면 자동으로 정책금융으로의 전환이 이뤄지도록 설계 중”이라며 “실패자에 대한 배제가 아닌, 회복자에 대한 설계가 제도의 목표”라고 밝혔다.
◇민관 보증, 리스크 분산이 핵심
금융 사다리 복원의 가장 큰 장애물은 ‘리스크 집중’이다. 민간 금융기관은 연체 이력이 있는 차주에게 대출을 꺼리며, 총량규제 하에서는 더욱 회피하게 된다. 이를 해소할 장치가 바로 공공보증이다.
경기도는 2025년부터 ‘중신용 복귀 보증제’를 시범 운영할 계획이다. 일정 기간(6개월 이상) 통신·임대료 납부 이력이 있는 연체 이력자에 대해 경기도신용보증재단이 70%를 보증하고, 금융기관은 30%만을 부담하는 구조다.
참여한 B은행 관계자는 “총량 압박 속에서도 리스크를 나눌 수 있기에 상품 설계가 가능했다”며 “보증의 구조화가 금융 사다리 복원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회복 가능성 평가 → 중신용 보증 → 제도권 전환
지금까지의 금융은 ‘한 번 실패하면 영원히 배제되는 구조’였다. 이제는 실패를 전제로 한 회복 경로를 제도화해야 한다. 소액 단기 상품으로 시작해, 성실 상환 이력이 쌓이면 중신용 보증 상품으로 전환하고, 이후 제도권 1금융 상품으로 이어지는 단계별 구조.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제도적 설계와 데이터 기반 평가다.
신용회복은 단순한 ‘부채 탕감’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금융 사다리를 복원하는 일이다. 총량규제가 놓친 그 사다리를 우리는 다시 세워야 한다.
금융은 더 이상 모두의 안전망이 아니다. ‘가계부채 관리’라는 명분 아래 시행된 총량규제와 DSR은 위험을 줄였지만, 절박한 실수요자들을 제도 밖으로 내몰았다. 이제 금융은 ‘얼마나 빌릴 수 있나’보다 ‘왜 필요한가’,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를 묻고 설계해야 한다. 그 길 위에, 금융 포용이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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