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는 금보다 귀한 향신료가 있었다. 이 작은 알갱이는 먼 동방에서 배를 타고 왔으며, 그 값어치는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중세에는 이걸로 세금을 내거나, 후손에게 유산처럼 물려주기도 했다. 이 보물 같은 향신료의 정체는 '후추'다.
후추는 후추나무의 열매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향신료 중 하나다. 후추나무는 인도 남부가 원산지인 상록 덩굴식물로, 열대 기후에서 잘 자란다. 주로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같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재배된다. 이 나무는 높이 4~10m까지 자라며, 작은 초록색 열매를 맺는다. 이 열매를 말리거나 가공해 검은 후추, 흰 후추, 녹색 후추 등 여러 종류로 만든다.
과거 집 한 채 값이던 향신료 '후추'
후추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검은 후추는 익지 않은 초록 열매를 따서 발효시키고 말린 것으로, 강렬한 매운맛이 특징이다. 흰 후추는 열매가 완전히 익은 뒤 껍질을 벗겨 말린 것으로, 검은 후추보다 부드럽고 깊은 풍미를 낸다. 녹색 후추는 익지 않은 열매를 소금물이나 동결 건조로 가공해 신선한 맛을 유지한 향신료다.
후추의 기원은 기원전 2000년경 인도 남부 케랄라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유르베다' 의학 문헌에서 후추는 소화를 돕고, 감기를 치료하는 약재로 기록됐다. 후추는 인도를 넘어 중동, 유럽으로 퍼졌으며,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이후 유럽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로마 제국 시절에는 후추가 사치품으로 여겨져 부유층의 상징이었다. '플리니우스 자연사'에 따르면, 당시 후추 1파운드(약 453g)의 가격은 은 4데나리우스(은화 4개)에 달했다.
후추는 중세 유럽에서 특히 귀했다. 5세기 로마가 멸망하면서 후추 공급이 끊기자, 가격이 치솟았다. 408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포위했을 때, 알라리크 왕은 속죄금으로 금, 은과 후추 3000파운드(약 1.36톤)를 요구했다는 기록이 '조시무스 역사'에 남아 있다.
후추는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중세 영국에서는 후추 1파운드로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었고, 독일에서는 세금으로 후추를 받았다. 심지어 15세기에는 후추가 너무 귀해 귀족들이 후추를 상속 재산으로 물려주기도 했다.
후추는 왜 그렇게 비쌌을까
후춧값이 높았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유럽에서는 후추를 재배할 수 없었다. 인도에서 출발한 후추는 아라비아와 중동을 거쳐야 유럽에 도착했다. 이 긴 항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위험도 많았다. 폭풍에 배가 뒤집히거나 해적에게 약탈당하는 일도 잦았고, 전쟁으로 무역로가 막히는 경우도 있었다. 배 한 척이 침몰하면 후추 수천 킬로그램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두 번째 이유는 유통 독점이었다. 아랍 상인들은 유럽 시장에 후추를 공급하면서 무역을 장악했고,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했다. 이들은 후추가 인도 밀림 속에서 괴물이 지키는 나무에서 자란다고 이야기하며 허황된 소문을 퍼뜨렸다. 실제보다 훨씬 얻기 어려운 물건처럼 포장해 가격을 끌어올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시 유럽인들은 후추가 소화를 돕고 나쁜 기운을 몰아낸다고 믿었다. 전염병이 돌 때는 이를 예방하는 약재로 쓰이기도 했다. 이런 믿음은 후추에 대한 수요를 더욱 키우는 역할을 했다.
몸에 쌓인다는 말, 사실일까
후추가 몸에 쌓인다는 이야기도 종종 떠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후추의 매운맛을 내는 '피페린'은 체내에서 대사돼 배출된다. '미국 국립보건원' 자료에 따르면 피페린은 소량 섭취 시 소화를 촉진하고 항산화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축적되지는 않는다.
후추는 많은 요리에 빠질 수 없는 재료다. 고기, 생선, 채소, 스프, 소스 등 거의 모든 요리에 어울린다. 검은 후추는 스테이크나 구운 채소에 풍미를 더하고, 흰 후추는 크림 소스나 아시아 요리에 부드러운 맛을 낸다. 녹색 후추는 샐러드나 스테이크 소스에 잘 맞는다.
요리에 활용할 때는 몇 가지 팁이 있다. 첫째, 후추는 열에 오래 노출되면 향이 날아간다. 때문에 요리가 거의 끝났을 때 갈아 뿌리는 게 좋다. 둘째, 통후추는 6개월 이상 보관하면 향이 약해진다. 밀폐 용기에 넣어 서늘한 곳에 보관하고, 3~4개월 안에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주의할 점은 과다 섭취다. 하루 권장량은 성인 기준 1~2g(약 0.5작은술) 정도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후추는 적당히 먹으면 안전하지만, 과하면 위장 장애나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다. 특히 후추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피부 발진이나 호흡 곤란을 겪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영양까지 풍부한 향신료
후추는 영양 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피페린 외에 비타민 C, 비타민 K, 철, 망간 등이 소량 들어 있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후추 100g에는 비타민 K 220μg, 철 13mg이 포함돼 있다. 다만, 후추는 소량만 먹기 때문에 영양 섭취의 주 공급원은 아니다.
인도에서는 후추가 종교의식에서 제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약재로 활용됐으며, 중국의 고전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는 후추가 몸을 덥게 하고 소화를 돕는다고 기록돼 있다.
유럽에서는 후추가 상류층의 부를 보여주는 수단이었다. 16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은 후추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이 자본으로 동인도회사를 세워 해외 진출의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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