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장단음 소회
음성학적으로 우리말의 가장 큰 특징은 장단(長短)이다. 강세와 어조 위주의 서양어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장단은 한자어로는 길고 짧음. 혹은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뜻하지만, 고유어로는 춤, 노래 따위의 빠르기나 가락을 주도하는 박자를 의미한다.
국어의 얼추 68%를 차지하는 한자어는 특히 동자이음(同字異音)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게 '장'(長)의 발음이다. 흔히 긴 '장'자로 통하는 묘한 글자다. '길다'라는 의미일 때, 발음은 오히려 짧다. 장신(長身), 장발(長髮), 장장(長長) 등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prime/premier'의 뜻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으뜸', '제1의', '최고의' 등의 뜻이 있다. 이럴 때 비로소 길게 발음해야 한다.
장손(長孫)[장:손], 장관(長官)[장:관], 장로(長老)[장:로] 등이 그 예시다.
'긴 장'이라는 뜻만 보면, 괜스레 길게 발음하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는 건 충분히 예측 가능하고 보통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 정확한 발음의 가치는 이렇게 허를 찌른다.
그래서 오히려 흥미롭지 않은가? 참고로 짧은 '단'(短)자의 소리는 길게 난다. 따라서 장점[장찜]이요, 단점[단:쩜]이다.
방송에서 제일 많이 틀리는 게 장신(長身)[장:신] 선수다. [장신]으로 짧게 발음해야 한다.
다음이 '강'(强)이다. 뭔가 강하니까 '길다'와 비슷하게 힘주어 긴 소리를 내고 싶지만 그 반대다. '굳세고 강하다'의 뜻일 때는 짧게 발음한다. 그래서 강조(强調)[강조], 강점(强點)[강쩜]이다.
강(强)자는 '억지로, 강제로'의 의미도 있다. 이럴 때 비로소 긴 발음이다. 강제(强制)[강:제], 강압(强壓)[강:압]이다.
'소'(素)도 여기 해당한다. 뜻이 '희다'일 때는 길게, '바탕'이면 짧게 소리 난다. 소복(素服)[소:복]이 길고, 소질(素質)[소질]이 짧은 이유다.
'중'(重)은 논쟁적이다. '무겁다'가 제1 뜻이지만 중건(重建), 중쇄(重刷) 등에서 보듯 반복의 의미도 오롯하다. 이걸 무시하고 '표준국어대사전'은 긴 발음으로 통합했던 때가 있다. 다행히 추후 사전 재사정 작업이 이뤄져 수정됐다.
"장단의 소용 가치는 의문이다. 맥락에서 파악하면 뜻을 알 수 있는데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단견'(短見)에 속한다. 장단음을 구사하지 않으면 발음이 강퍅해지면서 읽기와 말하기의 멋과 격이 떨어진다. '텍스트의 이해'에만 골몰하는 가벼운 주장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 장본인과 주역
주역(主役)은 신문 기사에서 자주 쓰는 한자 표현 중 하나다. 물론 아주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주역은 통상 좋은 일이나 중립적인 경우가 어울린다. 이런 자(者)에게 딱 맞는 말이 있다.
뜻이 "어떤 일을 꾀하여 일으킨 바로 그 사람", 바로 장본인(張本人)이다. 장본인은 부정적인 의미일 때, 주로 쓰인다.
장본(張本)은 고대 중국 시대 때 비밀 장부 같은 것을 일컫는다. 장(張)에 '어떤 일을 벌이다'의 뜻이 있다.
곧 이는 떳떳하지 못한 일과 관련되는 일이 많았다. 일본말로는 수모자(首謀者)에 해당한다.
'나쁜 일을 빚어낸 바로 그 사람'에 해당하는 말이다. 히틀러는 2차대전 발발의 장본인이다.
히틀러가 2차대전의 주역(부정적 의미가 아닌 의미의 주역)인가?
◇ '~가', '~이', '~을'의 쓰임새
한 독자에게 질문받은 내용이다.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는 표현을 쓸 때 '~이'나 '~을, 를'을 어떻게 쓰는 게 더 나은 방식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독자가 질문한 내용은 '매운 것이 먹고 싶네요'라는 문장에서, '매운 것'이 목적어이므로 조사 '을'이 와야 할 것 같은데, '매운 것이 먹고 싶네요',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네요'처럼 '이/가'를 조사로 쓰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이 문장이 틀렸다고 해야 할지가 그의 궁금증이다.
무조건 '매운 것을 먹고 싶네요'처럼 써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같이 쓰이기도 한다. 해당 문장에는 보조사 '이'가 쓰였고, 그러한 쓰임을 국어사전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이'는 받침 있는 체언이나 부사어 뒤, 또는 '-고 싶다' 구성에서 본동사의 목적어나 받침 있는 부사어 뒤에 붙어 앞말을 지정해 강조하는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다.
'나는 백두산이 제일 보고 싶다.'
'나는 김밥이 먹고 싶다.'
'나는 고향이 가고 싶다.'
비슷한 사례로 '~가'와 '~이'의 쓰임도 있다.
'아이들이 미래입니다. 동생을 갖고 싶은 000 올림'
모 기관의 출산 장려 캠페인 문구다.
'동생이 갖고 싶은'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언어 감수성이 높다.
'미연이는 동생이 정말 있으면 좋겠다고 여긴다.'
목적격 조사 '을/를'은 얼마나 평범한가. '나는 시원한 맥주를/맥주가 먹고 싶다'에서 어느 게 더 절실한가? 당연히 '맥주가'다.
'나는 박은빈을/박은빈이 보고 싶어'하면 어떤가? '박은빈이'가 더 강도가 높다.
이런 게 영어에는 없는 한국어의 묘미다. '이/가'는 강조를 나타내는 보조사로 쓰였다.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정부언론공동외래어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전 건국대·숙명여대·중앙대·한양대 겸임교수. ▲ 현 가천대 특임교수.
* 더 자세한 내용은 강성곤 위원의 저서 '정확한 말, 세련된 말, 배려의 말', '한국어 발음 실용 소사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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