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해방일지⑩] 1700만 ‘식집사’ 시대의 도래…반려 대상이 된 식물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권을 바탕으로 사회를 발전시켜 왔다. 모든 인간이 천부적인 존엄과 권리를 가지며 이를 보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은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졌다. 이후 동물권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넘어 동물 또한 불필요한 고통에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윤리적 인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떨까. 인류는 아직까지 식물이 단순한 자원 이상이며 고유한 존엄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식물의 생명을 경시하고 도구적 관점에서 이들을 착취한 결과 인간은 기후위기와 생태계 훼손이라는 결과와 직면하게 됐다. 식물이 소비의 대상을 넘어 존중의 대상이라는 관점이 이제는 필요한 때다.

본보는 ‘식물해방일지’ 시리즈를 통해 국내에서 아직 생소한 개념인 식물 존엄성을 조명하고 식물을 도구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인간과 식물의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특히 2023년 국내 최초로 발표된 식물 존엄성 선언을 바탕으로 식물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접근과 그 실천적 의미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기후위기 시대에 지속 가능한 생태적 삶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만들고 정책적 전환의 필요성을 논의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2021년 경남 함양군 농업기술센터 아열대식물원에서 열린 어린이 화훼체험 교육에서 금반초등학생과 병설 유치원생들이 노란 꽃화분 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 “식물을 기를 때는 오직 그들이 잘 자라기만을 바란다. 나와 상호작용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농담도 위트도 감사도 따뜻한 말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_한강 <빛과 실> 中

반려 관계란 함께 생활하며 교감하고 의지하는 관계를 말한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할 때 더 행복해지고 건강해진다는 사실은 다수 연구 결과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 식물과 떨어져 살아갈 수 없도록 설계돼 있다.

이 같은 배경 아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즐비한 도시에서 거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식물이 반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그렇게 현대인들에게 삶을 함께하는 친구, 동반자의 자리에 식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국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 이후 실내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난 시민들 중 식물을 통해 우울감을 해소하고 정서적 위안을 얻으려는 이들이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지난 3월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도시농업과가 발표한 ‘반려식물 인구 및 산업 규모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반려식물과 함께하는 인구는 약 1745만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34%에 달했다. 반려식물을 들인 장소(복수응답)는 실내 90.2%, 마당 13.2%, 정원 10.7% 등 순이었다.

‘식집사(식물+집사)’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보통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을 ‘고양이 집사’라고 칭하는데, 이는 도도하고 독립적인 성격의 고양이를 주인처럼 대접하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식물 역시 꾸준한 관리가 동반되지 않으면 식물과 함께 지낼 수 없게 된다는 의미에서 ‘식집사’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반려식물과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유대감을 쌓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식물은 인간과 정서적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생명체로서 의미를 지니게 됐다. ‘식물해방일지’는 이 같은 시대적 흐름 속에서 식물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명을 존중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식물과의 바람직한 관계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미술관 자작나무숲에서 관리하고 있는 화분들. ⓒ투데이신문

3명 중 1명은 ‘식집사’...“식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식물과 함께하는 삶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면서 실내에 놓이게 된 식물들은 식집사의 반려로 존재하게 됐다. 식물을 돌보는 세대가 예전처럼 중장년에 국한되지 않게 되면서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를 비롯한 각종 SNS에는 식물 돌봄 노하우와 일상 관찰기가 올라오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민 3명 중 1명은 반려식물을 기르는 식집사 문화는 청년 세대에서도 거침없이 퍼지고 있었다. 식물을 기르는 이들 중 30대 이하는 37.2%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60대 이상이 34.6%, 50대가 15% 등 순으로 많았다. 이들은 SNS로 ‘식스타그램’, ‘식물스타그램’ 등을 개설해 반려식물을 ‘내 새끼’, ‘새 식구’, ‘책상 위 귀염둥이’로 부르며 애정을 드러내고 서로의 식물 돌봄 경험을 나누는 데서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이처럼 반려식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한동안 집을 비우는 식집사들을 위해 식물을 관리해 주는 플랜트 호텔도 등장하는 등 이전에 없었던 현상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다. 식물이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공존과 돌봄의 대상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식집사 커뮤니티에서 만난 식집사 으쓱씨는 ‘오렝구’라고 이름 붙인 오렌지레몬나무와 4개월째 함께한 일화를 들려주며 스스로를 ‘식린이(식물+어린이·아직 식물을 기른 경험이 많지 않은 식집사를 이르는 말)’라고 칭했다. 그는 “꽃이 핀 상태로 자가수분해 준 뒤 열매를 맺을 무렵 비료를 듬뿍 줬더니 오렝구에게 열매가 하나 맺혔다. 아직 3mm 정도라 현미경에 대고 봐야 보이겠지만 잘 자랐으면 좋겠다”며 기쁨을 표했다.

4살 남매 쌍둥이를 기르는 식집사 덕자씨는 “식목일을 지나 아이들이 칼랑코에를 데리고 왔는데, 처음에는 뭔가를 돌봐야 한다는 게 부담됐지만 꽃이 예뻐서 계속 들여다 보니 정이 들었다”면서 “식덕부정기(식물+입덕부정기·식물에 빠져들기 시작했지만 이를 부정하는 시기)를 거쳐서 식물의 매력을 알게 됐다. 이제는 화분이 많아져 집에 둘 곳이 없어 일터로 식물을 가져간다”고 말했다.

2023년 식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현대인과 식물의 올바른 관계 재정립에 기여하고자 농촌진흥청이 발표한 ‘식물 존엄성 선언문’ 제4장에서는 “반려자는 반려식물이 외부 자극을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을 지니며 감각된 정보를 종합해 생존하고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며 “반려자는 그에 걸맞게 식물을 돌보고 존중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반려식물을 돌볼 때 반려자는 물과 영양분, 햇빛 등 생존에 필수적인 것을 제공해야 하며 식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식물의 복지 또한 고려될 필요가 있다. 이때 반려식물을 돌보는 방식은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자신의 방식으로 생존, 성장, 번식할 수 있도록 이뤄져야 한다.

식물과 반려의 관계를 맺고, 식물의 반려자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식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들이 적합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반려식물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동물이 서로를 돌보며 돈독한 관계를 이어나가듯 식물과 인간 역시 서로의 삶과 생명을 존중하는 것부터 반려 관계는 시작될 수 있다.

장제원씨와 동행한 테이블야자가 분갈이 수술을 받고 있다. ⓒ투데이신문

반려식물병원의 등장...‘식집사’들의 돌봄 문화

식물병원의 등장 또한 반려식물과 식집사의 관계가 지속성과 돌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례다. 자연 속에서 자라던 식물을 실내에 들여 화분 속에서 기르는 것은 쉽지 않은 여정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던 서식지에서 벗어나 변화된 환경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게 된 식물들은 면역력 저하와 병충해에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식물은 말을 하지 않고 서서히 상태가 변하기 때문에 명확한 병명을 진단하기 어렵다.

아픈 식물을 살리고 싶은 식집사들을 위해 서울시, 대전시, 고양시 등에서 반려식물병원이 개설됐다. 온라인으로 증상을 진단하고 치료법을 물을 수 있는 사이버 식물병원도 함께 생겼다. 아직 생소한 개념이지만 식물병원 의료진은 인간이나 동물을 치료하는 종합병원을 운영하듯 식물 조직을 들여다보며 정밀한 관찰로 반려식물의 병명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한다. 일부 병원에서는 며칠에 걸친 입원 치료도 지원하고 있다.

지난달 1일 방문한 서울 서초구 서울시농업기술센터 1층 반려식물병원에서는 천둥 번개가 치는 궂은 날씨를 헤치고 화분을 끌어안고 찾아온 이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식물병원이 외진 곳에 위치해 있음에도 빗길을 뚫고 찾아와 우산을 털어내는 식물 보호자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올라 있었다.

이날 오전 중에만 총 두 건의 예약이 있었다. 첫 번째로 방문한 환자는 박쥐란이었다. 박쥐란과 함께 병원을 찾은 식집사 표은경씨는 “집에 들인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친구인데, 주방 구석에 걸어두고 길렀다가 며칠 전부터 잎이 시들어 떨어져 가는 중이었다”면서 “이전에도 이 친구와 비슷한 식물을 길렀는데 1년이 되지 않고 죽어서 이번엔 병원을 찾게 됐다”며 우려를 내비쳤다.

시들해진 박쥐란은 아그렙토 소독약 처방을 받았다. 습기와 온도가 중요하지만 약을 뿌려둔 동안에는 병이 옮겨가지 않도록 환기를 잘 시켜줘야 한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표씨는 “인터넷을 찾아봐도 명확한 치료법을 확인할 수 없어서 너무 답답했는데, 이렇게 병원에 나와서 약도 받았더니 기분이 나아졌다”면서 “앞으로는 식물이 시들지 않고 오래오래 함께 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들고 있는 박쥐란 화분 손잡이에는 그의 소망에 응답하는 듯이 ‘스마일’ 스티커가 활짝 미소짓고 있었다.

박쥐란이 떠나고 난 30분 뒤 방문한 환자는 테이블야자였다. 잎이 절반 정도 시들어버린 테이블야자는 ‘합식(두 가지 이상 식물을 한 화분에 심는 것)’을 했던 과거가 환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입원실로 이동해 테이블야자의 분갈이 장면을 바라보던 정씨는 “뿌리를 잘라내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고 후회된다. 다른 날 식물이 아프더라도 직장을 쉬고서라도 미리 병원에 데려올 것”이라며 “회사에서도 금남수 화분을 기르고 있는데 잎이 반짝반짝해서 ‘반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며 식물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식물과 삶을 함께하는 식집사들은 반려자로서 반려식물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식물의 종의 특성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그들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 식물 존엄성 선언문에 따르면 인간이 반려식물을 화분에 심어 실내에 둘 경우 식물은 철저하게 인간에게 의존하게 되므로 인간에게는 식물의 특성에 맞게 그들을 관리해 줄 ‘돌봄의 의무’가 발생한다.

반려식물병원에서 의료진으로 활동하는 신창수 농촌 지도사는 “식물병원에는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오신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따님이 돌아가신 후 방치돼 있던 호야를 살리겠다고 데려오신 분이었다”며 “호야가 회복 가능한 상태라고 말씀드렸더니 눈물을 흘리셨다. 식물이 보호자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신 지도사는 반려식물과 함께하는 삶에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아이를 키울 때, 동물을 키울 때 공부는 필수적으로 선행되는 것처럼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어디서 자라고, 뭘 좋아하는지 정도는 꼭 알고 키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반려식물병원의 살균치료실에서 식물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 ⓒ투데이신문

“식물도 인간 돌본다...‘상호 돌봄의 의무’ 기억해야”

반려식물은 물질적 풍요 속 자연 결핍을 느끼는 현대 사회에 빈자리를 채워주는 소중한 존재로 여겨진다. 반려식물 전문가들은 식집사들이 식물을 통해 자기 치유와 상상력을 얻을 수 있으며, 이는 식물이 인간을 돌보는 과정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인간만이 식물을 돌본다고 생각하지만, 식물 역시 인간을 돌보고 있다는 것이다.

식물인문학 연구소인 초록생활연구소의 소장이자 <있는 힘껏 산다> (2024), <플랜테리어 101> (2024) 저자인 정재경 작가는 “식물을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인식하고 고마움을 품는 태도가 필요하다”면서 “인간이 돌봄의 주체라고 생각하기보다 식물 역시 인간을 돌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같은 상호 보완의 관계가 우리 삶의 이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식물을 바라보며 잎색의 변화, 꽃 피우기, 씨앗 맺기 등 식물의 변화를 관찰하게 된다. 관찰 과정에서 인간은 식물이라는 대상에 자기를 투사한다”며 “대상에 나를 투사하는 작업에는 상상력이 필요하고, 이는 자기 이해의 시작이 된다. 우리는 식물을 통해서 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제언했다.

정 작가는 “식물이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개체가 모여 있을 때 더 잘 자라듯 인간 역시 다른 생명들과 함께 있을 때 생존에 유리하다. 식물 시장이 확대되고 식물 생명 존중 개념이 확산되는 것은 인간과 세상을 이롭고 건강하게 만드는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려식물은 현대인들이 가장 가까이 두고 돌볼 수 있는 식물 중 하나이다. 우리는 식물을 통해 인간과 다른 생물을 이해하고 동질감을 느끼면서 공감 능력과 상상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식물도 빛을 감각하고 소리를 감지하며 기체 물질을 감각하는 존재다.

인간은 식물과 반려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현대 사회 속에서 겪는 결핍을 채워나갈 수 있고, 식물은 인간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이 반려식물과 함께하며 생명 간 돌봄과 존중이라는 새로운 삶의 균형을 경험할 때 비로소 공존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