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누군가의 손길로 다듬어진 공간이자, 자연과 함께 빚어낸 경관이다. 치유와 휴식을 제공하면서 생태계를 품는 그릇, 그리고 이웃과 소통하는 마당이 된다. 제주는 정원을 꾸미기에 이상적인 땅이다. 따뜻한 해양성 기후, 화산섬 특유의 토양, 사계절 변화에 따라 피고 지는 수많은 식물들. 그리고 돌과 바람, 물이 빚어낸 독특한 풍경까지 정원을 이루는 요소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섬 곳곳에 담긴 정원을 통해 '제주형 정원(J-가든)'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시리즈로 게재한다.
<편집자 주>
'청년약사에서 정원사로 변신.'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지역 '동백포레스트'를 운영하는 양우종(39) 대표는 안정된 약사 생활을 청산하고 정원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지금도 간혹 ‘약사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본업은 정원으로 바뀌었다.
양 대표 아버지가 2008년 옮겨다 심은 애기동백나무가 인연이었다. 당시 20년생 애기동백을 이식하지만 했지, 관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양 대표는 근처의 아버지 감귤하우스 농장에서 일하다 화사하게 꽃이 핀 애기동백을 보고 홀딱 반했다.
애기동백 농장의 잡초를 제거하는 등 기본적인 정리만 하고 나서 2018년 겨울 무료개방을 했는데 난리가 났다. 한 웨딩 스냅 작가가 올린 애기동백 꽃 사진에 매료된 관광객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교통 민원이 생길 정도였다.
이때 결심했다. "애기동백 정원에 새로운 인생의 승부를 걸자"고 마음먹고 약사생활을 접었다. 양가 부모님은 이해했으나, 할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면서 반대가 심했다. 성공 가능성을 자신했기에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애기동백나무를 솎아내고, 이식하고, 카페건물도 지으면서 동백포레스트를 꾸몄다. 2019년 겨울 개장했다. 그야말로 '초대박'이었다. 겨울철 마땅히 갈 곳 없는 관광객을 애기동백꽃의 숲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지난해 10월에는 민간정원으로도 등록했다.
편집자>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하루 4000여명이 찾을 만큼 대표적인 겨울 제주의 명소다. 눈이 쌓이면, 선홍빛 애기동백꽃과 하얀 눈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영상을 찍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 된다.
동백포레스트가 위치한 곳은 한라산 정상에서 동남쪽 방향이다. 겨울철 매서운 북서풍을 한라산이 막아주기 때문에 화사한 애기동백꽃이 오래 간다.
지난달 31일 찾은 동백포레스트는 정비가 한창이었다. 3월부터 10월까지는 문을 닫고 관리에 집중한다. 7900여㎡에 있는 280여그루의 애기동백을 일일이 전정하고, 삽목으로 어린 묘목을 키우고 있다. 양 대표는 동선을 정비하면서 돌담도 직접 쌓고 있다.
올해는 전망대를 새롭게 만들고 있다. 멀리 무인도인 지귀도가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 전망대 앞에는 잎이 독특한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었다.
양 대표는 "재방문하는 고객도 많기 때문에 조금씩 변화를 주려고 계속 고민하고 있다"며 "오시는 분들이 오감을 즐기면서, 다시 오고 싶어 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감귤과수원에서 4계절 꽃피는 공간으로 변신, 머들정원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 '머들정원'은 감귤과수원을 폐원하고 조성한 곳으로 2023년 9월 민간정원으로 등록했다. 머들은 돌무더기를 뜻하는 제주방언으로 주변에는 여전히 감귤과수원이 많다.
지난달 30일 감귤과수원 사이로 난 길에 들어서자 머들정원 돌담에 바위수국꽃이 한창이다. 정원 입구에는 양쪽으로 팽나무, 동백나무가 우뚝 솟았다. 제주를 대표하는 수종으로 식재한 것이다.
카페 건물을 뒤로 하고 정원으로 들어가 보니, 차수국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5월부터 여름까지 꽃을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수국을 심었다. 밑에는 새우란이 자리 잡았다. 서귀포지역 난(蘭) 전문가가 20여년동안 수집한 새우란을 모두 사들여서 옮겨 심은 것이다.
솔비나무는 보드라운 새 잎으로 치장을 시작했고, 붉은 열매가 인상적인 말오줌때나무도 초록으로 빛났다. 정원 경계에 있는 멀구슬나무는 자생으로 자란 상태를 그대로 보전했다.
물탱크를 활용한 전망대를 올라가는 길목에는 우람한 먼나무, 산딸나무가 자리를 지켰다. 하트모양으로 조성한 애기동백나무 숲은 붉은 빛을 발하기 위해 다듬어지고 있다.
정원을 둘러싼 목련은 정원주이자 조경회사를 운영하는 김승철(65) 대표가 애지중지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다. 수십년동안 가꿔온 목련은 봄에 화사하고 다양한 꽃을 피운다.
김 대표는 제주지역에서 30년 이상 조경전문가로 활동했다. 봄철 '핫 플레이스'인 표선면 가시리 녹산로 왕벚나무가 김 대표 작품이다. 1991년 최남단 마라도에 식재해 지금은 군락은 이룬 해송 숲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수망리가 고향인 김 대표는 아버지가 떠안은 빚보증 때문에 타인의 손에 넘어가던 감귤과수원을 지켜서 7년 전부터 정원을 조성했다. 1만1000여㎡에 400여종을 식재했다.
식물이 자리 잡는데 시간이 걸렸다. 조경전문가이지만 토양과 기상에 맞는 식물을 찾는 것에 시행착오를 겪었다.
김 대표는 "방문하는 분들이 언제나, 4계절 꽃을 볼 수 있는 정원으로 꾸미고 있다"며 "조경은 오랜 시간 애지중지 키운 나무를 팔아야하는 사업이지만, 정원은 계속 지켜보면서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토종·외래종, 인공·자연이 조화로운 가시림정원
'토종과 외래종의 조화, 나무와 초본 식물의 균형, 인공과 천연의 변주.'
지난 3일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가시림' 정원을 둘러보고 난 느낌이다. 제주의 토속적인 정서·풍토와 현대적인 감각이 모두 스며든 것으로 여겨졌다.
가시림은 2023년 11월 민간정원으로 등록하면서 유료 개장했다. 카페건물부터 인상적이다. 초가에서 얻은 현무암 돌로 벽을 쌓았고, 여기에 양치식물을 심었다.
건물 실내에서 통으로 된 유리창 너머를 보면, 풍경이 마치 곶자왈처럼 보인다. 곶자왈은 용암이 흐른 뒤 굳은 암괴에 형성된 숲으로, 바위를 움켜잡고 자라는 나무와 함께 다양한 양치식물이 서식한다. 이런 곶자왈 특징을 그대로 재현했다.
바닥에는 섬백리향이 연한 보랏빛 꽃을 피웠다. 땅을 기다시피하면서 자라는 자생종으로 잡초가 들어서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밑동이 어른 허벅지보다 굵은 참꽃나무가 눈에 확 들어왔다. 2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야생이든 조경이든 접하기 힘든 수령이다.
겨울철 황금빛 꽃을 피웠던 삼지닥은 이제 파릇파릇한 잎으로 갈아입었고, 병솔나무에는 너무나 선명한 빨간 꽃이 달렸다.
정원경계는 부지 조성을 하면서 나온 돌을 모아서 담으로 쌓았다. 돌무더기, 자갈무더기를 제주방언으로 '베케', '머들'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서는 '작박'이라고 표현했다.
300여그루가 몰려있는 애기동백나무 숲이 있는가 하면, 황금빛 메타세쿼이아 60여그루는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팜파스그라스, 수국, 하귤나무, 배롱나무, 능소화 등을 군락으로 조성했다. 곶자왈에서 공수한 종가시나무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1만4000여㎡에 90여종이 자라는데, 주로 나무위주로 구성했다.
30년 이상 조경사업을 한 강남춘(58) 가시림 대표는 10년 전에 이곳 용지를 매입했다. 토심이 깊고, 비가 많이 오면서도 물 빠짐이 좋아서 나무 키우기에 최적의 환경으로 판단한 것이다.
조경에 필요한 나무를 심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5~6년 전 정원조성으로 바꿨다. 인생의 전환점을 모색하다 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정원에 주목했다.
강 대표는 "오신 분들에게 감동을 줘야한다는 생각한다. 정원을 거니는 동안, 머무는 동안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고 힐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가고 있다. 정원은 완성이 아니라 끝이 없는 진행형이다"고 말했다.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연계한 사월의 꿩 정원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대도로변 '사월의 꿩'은 꿩엿 체험농장과 연계한 정원으로, 지난해 1월 민간정원으로 등록했다.
이 정원 옆에 있는 카페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멍'한 상태에 빠졌다. 바람에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멀구슬나무, 버드나무, 자귀나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바람멍'에 놓인 것이다.
바람만이 아니라고 하다. 비도 많고, 추워서 정원을 가꾸려고 심은 장미가 살아남질 못했다.
정원주인 강주남(59) 제주민속식품 대표는 적합한 식물을 찾으려고 주변을 섭렵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을 심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반경 4㎞까지 돌아다닌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 수국이다. 시험적으로 심었는데 잘 자랐다. 여러 종류의 수국을 구해서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30년 이상 운영하는 꿩엿공장 가업을 이어받은 강 대표는 2010년 어린이 등을 대상으로 한 체험농장을 운영하려다보니, 쉬고 노는 공간이 필요했다. 정원을 꾸민 동기다.
어린이들이 다칠 수 있는 물건을 모두 치우고 먼저 잔디를 깔았다. 독학으로 식물을 공부하면서 시행착오 끝에 수국이 화려한 정원으로 조성했다.
이 정원은 면적이 1700㎡, 식물 40여종으로 아기자기하지만 소리를 매개로 한 치유농장 등의 프로그램과 연계해서 힘을 발휘하는 특징이 있다. 꿩 등을 직접 볼 수 있고, 정원에서 어린이들이 체험을 하면서 직접 열매를 따먹을 수 있도록 블루베리를 심기도 했다.
강 대표는 "꿩엿 제조라는 제주의 전통과 성불오름 걷기와 음악치유 등과 더불어 생활속 정원 휴식공간이 되길 바란다"며 "정원을 연계한 돌봄농장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물이 포진한 밀림, 포레스트 사파리 정원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포레스트 사파리'는 지난해 1월 민간정원으로 등록했지만 관광지 안내문이나 인터넷 정보로는 공룡 테마파크인지, 정원인지 헷갈렸다.
지난 3일 직접 방문하고 나서야 의문이 풀렸다. 공룡을 비롯한 동물 모형이 숲 속에 포진했다. 동물들이 노니는 밀림 정원이다.
이 곳을 조성한 지경섭(70) 제주마그마에너지 회장의 첫 구상은 어린이 놀이공원이었다. 지 회장은 "해외를 다녀보면 어린이들이 즐기는 테마파크, 특히 동물원이 많은데 비해 제주는 전혀 없다"며 "실제 동물을 기르고 관리하기보다는 모형으로라도 비슷한 경험을 하도록 하자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2009년부터 2만4000여㎡ 사업용지에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시설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공룡을 선두 주자로 해서 호랑이, 기린, 원숭이, 뱀 등 다양한 동물을 배치했다. 센서를 통해 움직임을 주고, 울음소리를 내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나무도 심었다. 동물만 있는 경관보다는 숲이 있으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토심이 얕은 지역이다 보니 강풍에 맥없이 나무가 쓰러지기 일쑤였다.
흙을 사다가 나무심기를 반복했다. 매입한 흙만 트럭 1000대분이다. 나무와 초본식물은 수천그루에 이른다. 10여년이 흐르자 동물과 숲이 자연스런 풍경을 연출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팽나무, 꾸지뽕나무, 단풍나무, 후박나무, 삼색병꽃 사이로 여러 종류의 공룡이 나타나 어린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지 회장은 "여러해 동안 나무를 심으면서 숲 정원이 되다보니 동물들도 더욱 실감나게 됐다"며 "처음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테마파크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숲을 즐기는 어른들도 함께 힐링하는 공간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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