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량규제의 역설] ②대안으로 떠오른 ‘목적 기반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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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량규제의 역설] ②대안으로 떠오른 ‘목적 기반 금융’

직썰 2025-06-01 09:00:00 신고

3줄요약

이제 금융은 ‘얼마나 절박한가’보다 ‘얼마나 갚을 수 있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총량규제는 가계부채 관리를 명분으로 시행됐지만, 정작 가장 절실한 실수요자들이 제도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대출 문턱은 높아졌고, 고금리 대안만 남았습니다. 이 시리즈는 ‘총량’이라는 숫자 뒤에 숨겨진 현실을 추적한다. 고금리에 내몰린 청년과 서민, 구조적 배제의 메커니즘, 그리고 복귀조차 허락되지 않는 금융의 자기모순을 다룹니다. 정책은 숫자를 관리했지만, 삶은 계산 바깥에 있었습니다. 규제의 목적은 무엇이며, 금융은 누구를 향해야 할까요? 그 질문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편집자주]

[그래픽=안중열 기자]
[그래픽=안중열 기자]

[직썰 / 안중열 기자] “대출이 거절된 사람에게 진짜 물어야 할 건 ‘신용등급’이 아니라 ‘왜 필요한 돈인가’입니다.”

서울금융복지상담센터에서 근무하는 상담사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대출 심사 기준은 소득과 신용점수라는 절대 지표에 매몰돼 있다. 그러나 목적에 따라 리스크는 달라지고, 지원의 정당성도 달라진다. ‘목적 기반 금융(Purpose-Based Finance, 이하 PBF)’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수요자의 ‘이유’를 중심에 두고 금융 재설계 움직임은 조용하면서도 밀도 있게 전개되고 있다.

◇이제는 ‘왜’가 중요해진 금융의 시대

2024년 2월, 금융소비자연맹이 전국 20~60대 금융소외층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3.1%가 대출 목적을 ‘생계비’ 또는 ‘주거 관련 필수지출’로 응답했다. 그러나 현행 제도는 소득과 신용점수라는 구조적 심사틀에만 의존해 ‘쓰임의 절박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2023년 대출 목적별 취급 및 거절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체 대출 중 생계 및 주거 목적 신청자의 평균 거절률은 17.6%로, 여유자금(투자·소비 등) 목적 거절률(6.3%)의 약 2.8배에 달했다. 목적별 리스크 차등을 고려하지 못하는 심사 관행이 오히려 필수 지출 수요자의 제도권 이탈을 유발하는 셈이다.

그 결과, 생계 기반을 지탱해야 하는 계층이 제도권 금융을 외면하거나 외면당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금융 거절이 아니라, 사회적 이탈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목적별 리스크 분류, 해외는 이미 도입

핀테크 업계에서는 목적 기반 리스크 분석이 이미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업스타트(Upstart)는 공과금 납부 이력, 교육 수준, 고용 형태 등 비재무 정보를 반영한 대출 평가 모델을 상용화했고, 해당 모델은 전통 신용평가 대비 27% 낮은 연체율을 기록했다(2023년 기준).

독일 KfW은행은 정부 보증을 기반으로 저소득층의 생계·교육 목적 대출을 지원하며, 2023년 기준 연방정부의 금융보증을 받은 사회보장대출 규모는 총 110억 유로에 달했다. 일본은 소득연계상환제도를 통해 연소득 325만엔 이하 차주의 학자금 상환 부담을 연간 소득의 10%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세계은행(WB)이 집계한 2023년 기준 정부 주도의 목적 기반 금융제도 운영 국가는 48개국에 이르며, 이 중 60%는 생계·주거 목적에 특화된 구조였다. 리스크는 ‘액수’가 아니라 ‘목적과 상환 구조’에 따라 재평가될 수 있다.

◇제도권 복귀 가능성을 설계할 수 있는가

소득·신용 기반의 총량규제가 제도권 배제를 확대한다면, PBF는 제도권 복귀의 진입로로 기능할 수 있다. 미국 뉴욕시의 ‘크레딧 빌딩 프로그램(CBP)’은 일정 기간 저소득층이 연체 없이 상환할 경우 신용등급을 자동 상향시키는 구조다. 실제로 2023년 프로그램 참여자의 1년 후 평균 신용점수는 45점 이상 상승했다.

영국 정부는 2022년부터 사회적 채권(SIB: Social Impact Bond)을 통해 실직자의 주거 비용을 대출 형태로 제공하며, 성실상환 시 재취업과 신용 복구를 동시에 지원하는 시스템을 운용 중이다. 이는 단순한 복지 확대가 아닌, 금융을 통해 삶의 기회를 회복시키는 구조적 개입이다.

한국에서도 움직임이 있다. 한국신용회복위원회가 2024년 3월 공개한 자료에서 “비은행권 이용자 중 42.3%가 제도권 복귀를 희망하고 있으며, 제도화될 경우 연간 약 50만 명 규모의 수요자 기반이 형성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제도 밖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의 절박한 목소리다.

◇데이터 기반 신뢰 인프라가 핵심

PBF가 작동하기 위해선 ‘목적’을 신뢰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현재 개인신용평가에 활용되는 대체 데이터 비중은 12.4%(2023년 말 기준)에 불과하다. 통신비·공과금 납부 정보, 소득 형태 등 실질적 지표는 데이터 접근권과 개인정보 활용 이슈로 인해 활용에 제약이 크다.

2024년 4월 국회에 발의된 ‘데이터기반 금융지원법’은 정보 제공자의 동의를 전제로 통신 3사와 주요 공공요금 납부 정보의 신용정보 반영을 허용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이 발표한 입법영향 분석에 따르면, 해당 법안이 통과될 경우 대체 데이터 활용 비중은 최대 35%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이처럼 PBF는 단순한 금융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인프라, 그리고 사회적 신뢰를 재설계하는 일이다. 금융의 목적을 ‘수익’에서 ‘필요’로 바꾸는 새로운 틀이다.

◇‘총량규제’와 ‘목적 기반 금융’의 공존을 위해

총량규제는 거시적 부채관리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 일률적 잣대가 필수 지출 수요자를 제도권 밖으로 몰아내고 있다. PBF는 이러한 구조에 질문을 던진다. ‘얼마나 버느냐’가 아니라 ‘왜 필요한가’에 주목하는 금융은, 규제와 대안의 이분법을 넘어 제도권 복귀의 기반이 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이분법’이 아니다. 총량규제는 계속돼야 하고, 금융의 건전성도 확보돼야 한다. 하지만 그 안에 ‘목적’이라는 변수 하나를 더 넣는 것. 지금의 금융이 가야 할 다음 경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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