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라 무엇보다 내가 모른다고 인정하는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중략…) 현대 과학은 무지를 기꺼이 받아들인 덕분에 기존의 어떤 전통지식보다 더 역동적이고 유연하며 탐구적이다. 덕분에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능력과 새로운 기술을 발명할 역량은 크게 확대했다.”
서유럽의 통치자들은 과학자와 기술자의 후원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 차이가 동서양의 운명을 갈랐다. 일본의 개화파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1875년 『문명론 개략』에서 일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문명은 한 나라 인민의 지덕知德을 밖으로 드러내는 현상이다. (…중략…) 일본 사람의 지혜와 서양인의 지혜를 비교해보면 학문·기술·상업·공업, 가장 큰 일에서 가장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부터 헤아려 백에 이르고 또 천에 이르기까지도 그들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다.”
게다가 일본은 권력이 편중된 탓에 신분사회가 고착되어 있어 후쿠자와는 ‘인민의 품행도 비굴’하며 ‘권력의 편중 병폐를 바로잡지 않으면 근대적 국가도 근대적 국민도 불가능하다.’라고 보았다.
“인민은 국사에 관심이 없다. 나라의 치란과 흥망 그리고 문명의 진퇴에 관해 마치 구경이나 하듯이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일본에 정부는 있어도 국민은 없다”고까지 단정지었다. 그의 비판은 일본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후쿠자와는 ‘혁명이 아니라 문명이 역사를 진보시킨다.’라고 믿었고 서양 문명의 핵심이 가치관에 있음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서양 문명의 핵심인 자유와 공화의 가치를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명의 과제인 자유와 공화의 가치부터 받아들이고 자유로운 기풍의 근대적 국민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당면과제인 나라의 독립도 가능하다.’
이것은 세계와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의미를 바꾸는 것으로 그야말로 대대적인 ‘인식의 혁명’을 필요로 했다. 근대화는 정치에서 종교가 분리되고 학문에서 종교가 분리되는 것을 의미했다. 서유럽은 이러한 분리가 성공하면서 경탄할 만한 성과를 낳았다. 반면 조선은 유학자가 정치권력과 종교 그리고 교육을 모두 장악했고 후쿠자와와 같이 자신을 냉혹하게 성찰하고 사회를 각성시키는 선각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중국 문명의 도덕, 예술, 지식을 참된 보고로 여겼다. 서구로부터는 배울 것이 없고 오히려 서양을 오랑캐로 여기며 조선의 도덕과 순수성이 파괴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전환기17]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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