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12년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흡연과 폐암 사이의 명확한 인과관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흡연이 폐암과 후두암 등 주요 질병의 주된 원인이라는 의학적 근거도 유전적 요인보다 강하게 입증되고 있다.
19일 건보공단에 따르면 공단이 국내 시장 점유율 1~3위 담배제조사인 KT&G·필립모리스코리아·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의 최종 변론이 오는 22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긴 법적 공방은 2014년 건보공단이 담배제조 3사를 상대로 533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청구 액수는 20갑년(하루 1갑씩 20년간 흡연) 이상, 30년 흡연한 뒤 폐암이나 후두암을 진단받은 환자 3465명에게 공보공단이 지급한 급여비(진료비)를 기준으로 책정됐다.
개인이 담배소송을 제기한 적은 있으나 이처럼 공공기관이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2020년 11월 1심 선고에서 재판부는 흡연 이외에 다른 원인으로도 폐암이 발병할 수 있어 인과관계가 없는 것은 물론 담배회사가 중독성 등을 축소·은폐한 사실이 없다며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환자들이 흡연 외에 다른 위험요인, 예를 들어 흡연 노출 시기와 강도, 생활습관, 가족력 등이 없다는 점이 추가로 입증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같은 결과가 나오자 건보공단 즉각 항소에 나섰고 이후 5년이 넘도록 긴 법적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2심 판결은 곧 나올 것으로 보인다. 서울고법 민사6-1부(재판장 김제욱)는 2심 변론 기일을 오는 22일로 계획했다. 재판부는 이날 변론 기일을 마친 뒤 선고 날짜를 발표할 전망이다.
건보공단은 손해배상 소송의 항소심 최종 변론을 앞두고 흡연과 폐암 발병의 강력한 인과 관계를 입증할 연구 결과를 공개하며 판세를 뒤집으려 하고 있다.
건보공단 건강보험연구원은 지난 18일 흡연자가 30년 이상 하루 한 갑씩(20갑년) 담배를 피울 시 비흡연자와 비교해 소세포폐암에 걸릴 위험이 54.49배 높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이는 1심에서 흡연과 폐암 간의 뚜렷한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해 패소한 건보공단이 항소심에서 판결을 뒤집기 위해 준비한 주요 증거 중 하나다.
다른 결과도 살펴보면 소세포폐암 외에도 편평세포폐암 역시 현재 흡연자는 비흡연자에 비해 발생 위험이 25.8배 높았은 것으로 파악됐다. 과거 흡연자는 11.2배 낮아지는 등 금연 효과도 두드러졌다.
건보공단은 이 같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 이로 인한 국민 건강 피해에 대한 담배회사의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번 소송은 흡연이 질병에 미치는 영향과 담배회사의 법적 책임 범위를 판단하는 중요한 선례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건보공단이 지출한 막대한 의료비 중 일부를 담배회사로부터 환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 가운데 국민 10명 중 6명이 폐암 환자의 의료비를 담배 회사가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는 지난 1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와 ‘흡연과 폐암, 주목받는 담배소송’ 심포지엄을 개최해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온라인 방식의 이번 설문조사는 지난 3월 27일부터 4월 15일까지 전국 20세 이상 성인 1209명(비흡연자 757명·흡연자 218명·금연자 234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국민의 63.7%가 건보공단이 주장하는 담배회사의 의료비 부담에 찬성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흡연이 폐암을 유발한다고 생각하냐’고 묻자 전체 응답자의 91%가 ‘그렇다’고 답변했다. 위험도에 대한 추가 질문에는 ‘10배 높다’는 응답이 비흡연자가 49.1%로 가장 많았다. 그다음으로는 금연자의 46.6%, 흡연자의 38.5% 순이었다.
담배의 중독성에 관련해서는 흡연자의 62.8%, 비흡연자의 70.4%, 금연자의 66.1%가 ‘매우 그렇다’는 응답을 택했다.
의료계, 보건의료 시민사회단체 등도 건보공단을 지지하는 성명을 잇따라 냈다.
국립암센터, 국립중앙의료원, 대한의사협회 등 18개 보건의료 단체는 지난 8일 건보공단의 담배 소송을 지지하는 공동 성명을 내고 “흡연은 개인의 선택이 아닌 담배회사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중독의 결과다. 담배의 니코틴은 흡입 후 10초 내 뇌에 도달해 도파민 수용체를 자극하며 강한 의존성을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로 인해 흡연자의 상당수는 금연 시도에도 불구하고 중독으로 인해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며 “담배회사는 중독성을 강화하기 위해 니코틴 함량을 조절하고 첨가제를 사용하며 필터 디자인을 조작해 연기가 폐 깊숙이 침투하도록 설계했다. 이는 흡연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중독을 조장하는 계획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또한 의료계는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담배회사가 흡연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부정하며 질병의 원인이 불분명하다는 허위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민사회도 힘을 보탰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참여연대 등 40여개 단체가 참여하는 무상의료운동본부는 19일 ‘담배로 인한 폐해는 담배 회사의 책임이다’라는 성명을 내 “담배 회사들은 자신의 불법행위와 비윤리적 행위로 발생한 국민 피해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며 “중독성 강한 담배를 만들어 놓고도 개인의 자유의지 문제로 몰아가려는 기만적 행위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의료계 등의 지원 사격에도 불구하고 2심에서 건보공단이 승소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앞서 담배 회사들은 건보공단이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맞서왔다. 흡연으로 암에 걸린 환자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는 있어도 건보공단이 소송을 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게 담배회사 측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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